사데풀 아줌마 / 박영자
그녀를 알게 된 건 작년 겨울, 아젤리아가 베란다에서 분홍빛 첫 꽃잎을 열던 날이었다. 한겨울을 건너며 꽃을 피운 그 인내가 가상하여 상이라도 주려고 영양제 몇 알을 뿌려 주다 보니 한편에 낯선 풀 한 포기가 눈에 띈다. 동글동글 야들야들한 잎을 몇 장 펼친 것이 좀씀바귀를 닮았다. 너무 연약해 보이는지라 선뜻 뽑지 못하고 그냥 두었다.
그녀는 곁방살이를 하면서도 하루가 다르게 쑥쑥 컸다. 어느 날 물을 주다 보니 아젤리아는 난쟁이처럼 밑에 깔려 있고, 그 풀이 껑충하게 커서 시야를 가리고 있으니 누가 주인인지 분간이 어려울 지경이다. 진즉 뽑아 버려야 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삶의 의지가 강하게 느껴지니 어쩌지 못했다. 얼마 되지 않아 여러 가래로 가지를 뻗었고, 가지 끝에 노랑 민들레 닮은 작은 두상화(頭狀花)를 조롱조롱 달았다. 둥글둥글 귀엽던 잎은 어느새 길쭉한 피침형으로 변해있고 잎 둘레가 톱니처럼 거칠기까지 하니 어릴 때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억척스럽고 모질어 보이는 아줌마 같다.
그녀는 햇빛을 한 줌이라도 더 받겠다며 내 키만큼 크고 날씬한 몸을 창가 쪽으로 구부린 채 꽃들에게 “남쪽으로 얼굴을 더 내밀어. 어서 내밀라니까.”를 외치며 하루에 예닐곱 송이씩 꽃을 피워 냈다. 꽃은 이내 하얀 솜털을 단 씨앗방망이로 변했다. 후~불면 날아오르는 민들레 씨앗의 축소판이다. 그녀의 정체가 궁금했다. 잎을 조금 뜯어 씹어보니 쌉쌀하다. 야생화 도감에서 이름이 사데풀이며 의외로 국화과라는 것을 알아내고 그녀는 나와 더 가까워졌다.
나를 유혹하여 조금만 스쳐도 후루룩 꽃씨를 떨군다. 더러는 내 입김에 불리어 다른 화분 위로, 더러는 베란다 바닥에 떨어지곤 했다. 꽃 한 송이가 맺는 씨앗은 셀 수 없이 많았다. 대단한 종족번식의 본능을 보면서 혀를 찼다. 여름까지 그녀는 왕성하던 생산기능을 다하고 할머니가 되어, 누렇게 바른 줄기를 걷어냈다.
올겨울에 아젤리아 화분의 똑같은 위치에 그녀는 부활했다. 작년처럼 정신없이 꽃을 피워대는 바람에 겨울이 심심치 않았다. 그런가 하면 다른 화분들마다 제 어미 닮은 여린 자식들이 “엄마, 나 여기 있어.” 하며 제 어미를 불러댄다. 아줌마는 “오냐, 내 새끼들 용타.” 새끼들을 훑어보며 흐뭇하게 웃는다.
나는 차마 그녀를 뽑지 못한다. 그녀의 모습에 얼비치는 내 어머니의 모습에서 연민의 정을 느낀다. 아니 그 건 내 젊은 시절의 모습이기도 하다. 그녀 옆에서 나는 ‘그래 너처럼 치열하게 살아야 해.’ 하며 힘을 얻는다. 베란다는 머지않아 사대풀 천국이 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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