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가는 사내 / 윤정혁
그는 불도 켜지 않은 안방에서 칼을 갈고 있었다. 동향인 작은 아파트의 그다지 넓지 않은 방은 불을 켠 거실에서 보아 약간 어두워 보인다. 여러 장 겹쳐 깐 신문지 위에 놓인 닳은 숫돌과 물그릇, 가지런히 놓인 여러 개의 칼이 눈에 들어온다. 그는 칼 갈던 손을 멈추지도 않은 체, 흘끔 눈을 올려 떠 보는 것으로 나의 인사를 받는다. 술 냄새가 난다.
그의 칼 가는 일이 이내 끝 날 것 같지도 않아 거실로 물러나 앉는다. 제사가 시작되는 자정 넘어까지 별다른 얘기가 있지는 않을 것이다. 그와 정면으로 눈이 부딪히지 않을 거실 한 쪽 벽에 기대앉아 그를 지켜본다.
이미 갈아놓은 네 자루의 칼은 한 눈에 날이 서 있음을 알 수 있다. 큰 주방용 식칼이 두 자루, 다음 크기의 날이 심하게 닳은 식칼이 한 자루, 나머지 세 자루는 크기와 길이가 고만고만한 과도로 하나같이 날이 많이 닳아 본래의 모습이 아니다. 그것들을 무슨 음모를 도모하는 것처럼 차갑고 음산하게 보인다. 서두르지 않는 여유로운 손놀림이다. 사이사이 칼을 뒤집어 날이 선 정도를 오른 손 엄지로 긁어 확인해 보기도 한다.
꼬리가 약간 처진 굳게 다문 입과 깊이 파인 미간의 주름은 그의 순탄치 않았던 삶의 궤적처럼 어두워 보인다. 그의 행위는 마치 무슨 의식을 치르는 듯해서 누구든 중간에 끼어드는 것이 조심스러울 정도다. 대개의 사람들은 무슨 일이든 그 일에 몰두할 때, 마음속의 혼란과 분노를 가라앉히고 평정을 찾게 된다. 그는 거꾸로 분노와 혼란을 키워가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키운 분노가 언젠가 모습을 드러낼 것 같아 두렵다.
이윽고 그가 칼 가는 일을 끝낸다. 그는 문갑 위에 놓인 화장지통에서 화장지 한 장을 쓰윽 뽑아, 갈아놓은 여섯 자루의 칼을 집어 들고 하나하나 정성스레 칼날을 닦는다. 자리를 털고 일어서는 그와 눈이 마주치는 것이 거북해 나는 얼른 시선을 장식장 쪽으로 돌린다. 거기 술병이 가득하다.
칼을 갈 때 깔았던 신문지들을 차곡차곡 접어 한쪽으로 치운 그는 이제 날선 과도 하나로 마른 문어발에 칼집을 내기 시작한다. 세 번은 얕게, 네 번째는 깊게, 칼집이 난 문어발은 마른 꽃으로 피아나기 시작한다. 아버지가 제상에 올릴 밤을 치는 일이나 문어발에 칼집을 내는 일을 할 때, 턱 밑에 앉아 그 알을 지켜보며 시간 가는 줄 몰랐던 유년의 기억이 피어난다. 이젠 장손인 그가 한다. 곧 물에 불린 밤을 칠 것이고 지방을 쓸 것이다.
그는 작년부터 느닷없이 절사 때나 기제사 때 제복으로 두루마기 대신 도포를 입고 건을 쓰기 시작했다. 영벽정 시월제를 다녀온 이후부터다. 전에 없이 고향 종회 회장 일을 맡질 않나, 부쩍 문중의 대소사에 관심을 보인다. 그가 종손이어서이거니 하지만, 전에는 볼 수 없었던 행동이다. 내겐 그런 그의 모습이 낯설고 못마땅하다.
종가의 위엄을 지켜줄 그 무엇도 남아 있지 않다. 고향의 집과 전답은 사라진지 너무 오래 되었다. 그는 세파에 밀려 도회의 변두리 작은 아파트에서 무위의 세월을 산다.
조모 제사다. 명색 종가에 동생인 나를 빼고는 제객 하나 없다. 서울로 직장을 구해 나간 장조카도 기제사에 코빼기를 내밀지 않은지 오래다. 이제 자정이 넘을 때까지 기다려야 하다. 등 뒤의 형수와 아내에게 도포차림의 그와 양복차림의 내 모습은 아무래도 어울리는 그림은 아닐 것 같다.
그가 청승이 넘치게 축문을 읽어내려 간다. 나는 여덟 폭 병풍의 한시를 짚어 내려간다. 모르는 글자가 많아 군데군데 막힌다. 삽시(揷匙)후에 조모 회갑 때 소 잡은 이야기를 한다. 면에서 회갑잔치에 소 잡은 집은 일찍이 없었다고…. 절사 때는 제객이 설자리가 없어 대청마루에 몇 줄로 서야 했다는 둥, 손 크기로 소문났던 어머니에 따른 갖가지 일화며, 나로선 알 수 없는 조금은 부풀려졌을 법한 이야기가 줄을 잇는다. 전에는 안 하던 이야기다. 꿈꾸는 듯한 도포차림의 그가 안쓰럽다. 나는 그와 여섯 살 터울이다.
이집 칼들의 모양새가 하나같이 날이 닳아빠진 몰골을 한 까닭은 오래 써서가 아니라 그가 시도 때도 없이 너무 자주 갈았기 때문이다. 그는 살같이 달아나는 세월이 야속하고 무섭다. 조석으로 달라져가는 세상에 맞서지도, 변화의 고통을 극복하지도 못하면서 그저 분하고 서운해서 칼을 간다. 그렇다고 갈아놓은 칼로 무슨 일을 저지르지도 못한다. 그와 마주하고 있으면 얼핏 그의 눈 속에 이런 분노와 두려움을 함께 읽을 수가 있다.
그는 두려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세상을 거슬러 살고 싶어 하고 그것이 여의치 않아 칼을 갈고 술을 마신다. 세상에, 마음속에서 칼을 갈고 있지 않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나도 그처럼 칼을 간다. 허물어져가는 육신처럼 무기력하게 찌들어가는 나의 영혼과, 역겨운 세상사의 심장을 노리기 위해 칼을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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