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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1

[좋은수필]해뜨는 집의 크리스틴 / 구활

해뜨는 집의 크리스틴 / 구활  

 

 

 

그날 밤 우리가 그곳에 도착한 시각은 세시를 조금 넘고 있었다.  

그리 좁지도 않은 골목길은 밤이 너무 깊은 탓인지 호객행위도 끊겨 있었다. 다만 대문 위에 켜져 있는 홍등(紅燈)만이 지겹다는 듯이 희미하게 졸고 있었다.  

타지에서 온 소설가 Y의 제안에, 신예시인 L의 맞장구로 우리는 이렇게 유곽거리를 서성이고 있었다.  

“그곳에는 예기치 않았던 소설의 소재가 있을지 몰라.” Y의 약간은 부끄러운 듯한 변명에 “그렇지. 그곳에는 정액 냄새가 물씬 풍기는 시어(詩語)들의 파편이 시궁창에 버려져 있을지 몰라.” 라는 L의 동의로 우리의 홍등가의 이 골목 저 골목을 싸질러 다녔지만 소설의 소재가 될 만한 여인도 한 톨의 시어도 발견하지 못했다.  

“근처 해장국 집에서 해장술이나 한 잔 하지.” 누군가의 또 다른 제의에 발걸음은 다시 목로주점을 향하고 있었다.  

우리가 골목을 거의 다 빠져나왔을 무렵 골목 입구에 박아 둔 돌 위에 얼굴을 치마폭에 묻고 쭈그리고 앉아 있는 한 여인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그 모습은 마치 빈센트 반 고호가 창녀 크리스틴의 벗은 알몸을 그린 후 슬픔(sorrow)이라 명제한 스케치 작품 속의 바로 그 여인이었다.  

그림 속의 크리스틴은 몹시 야위었고 유방은 축 늘어져 당시 고호가 처해 있던 가난하고 서러운 이야기들을 그녀의 살 속에 밀어 넣은 것 같았는데 여기 밤 늦은 시각에 길가에 쭈그리고 있는 이 여인은 전체 창녀들의 피곤함과 권태로움 그리고 서러움까지를 온몸으로 내비치고 있는 것 같았다.  

“아가씨, 아가씨, 왜 여기 앉아 있소?”  

“시내에 잠시 다녀 오니 내 방이 없어졌어요. 다른 아가씨가 손님과 잠시 내 방을 차지해 버린 걸요.” 우리 넷은 쉽게 한 통속이 되어 낮에는 쉬고 야간영업만 하는 홍등가 주변 목로주점의 방 하나를 얻어 해장술을 벌였다.  

우리가 발견해낸 크리스틴이 우리의 술친구가 되어 준 냇가를 일만원짜리 지폐 한 장으로 때우고 왁자지껄하게 이야기판을 펼쳤다. 

소설가는 소설가대로, 시인은 시인대로 나름대로의 집중적인 질문을 퍼부었다.  

“이름은 J라고 해요. 이곳에 온 지 반년쯤 됐어요. 저의 직업은 창녀, 그러나 저의 직업을 부끄럽게 생각하거나 저의 행위를 수치스럽게 느끼지 않아요.”  

너무나 당돌한 크리스틴의 얘기에 화들짝 놀라 자세히 쳐다보니 그녀는 팔등신에 가까운 몸매에 빼어난 미모를 지니고 있었다. 핏기 없는 얼굴과 탄력을 잃어버린 피부가 흠이라면 흠이었다.  

우리의 크리스틴은 맥주 한 컵을 단숨에 들이킨 후 이야기를 계속했다.  

“대전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여고를 다녔어요. 큰 부자는 아니었지만 여고시절에 아버지가 빨간 자전거를 사줄 정도였으니 아마 중류 가정은 됐나봐요. 그런데 그 빨간 자전거가 내 운명을 이렇게 돌려 놓았어요. 자전거를 타고 등교하는 내 모습이 또래 남학생들 사이엔 선망의 대상이었어요.”  

크리스틴은 소설가 Y가 마시는 술잔을 채근하여 되받아 마시고 얘기를 이어 나갔다.  

“저의 발랄한 모습에 눈독을 들이고 있던 불량배들이 저를 끌고 갔어요. 아마 그날은 비가 왔을 거예요. 언니의 바바리 코트에 깃을 세우고 여고생 특유의 감상에 젖어 빗길을 걸었던 게 화근이었어요. 으슥한 헛간으로 끌려가 그렇게 당했어요. 그 짓은 번갈아 가며 아침까지 계속되었고 나는 죽어 버리고 싶었습니다. 아니 그때 죽었는지도 몰라요. 아저씨, 술 한 잔만 주세요.”  

처절할이만큼 잔인했던 크리스틴의 기억이 내게로 전해 오는 순간 그녀의 미모와 아름다운 몸매는 간 곳 없고 반 고호가 가장 비참했던 시절에 만났던 창녀 크리스틴이 거기에 앉아 있었다.  

꼴깍! 하면서 크리스틴의 목구멍으로 술이 넘어가는 소리와 동시에 눈물 방울이 그녀의 두 볼을 타고 내렸다.  

“날이 훤하게 밝아서야 풀려났고 나는 죽어 버릴 장소를 찾고 있었어요. 어느 곳에도 정착할 수 없는 방황은 시작됐고 방황은 끝내 가출로 이어졌어요. 나를 짓밟고 간 그들이 처음에는 죽이고 싶도록 미웠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고 보니 이제 그들을 용서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래서 창녀가 되었는지 몰라요.”  

술을 계속 청해 마신 탓으로 약간은 취한 듯한 우리의 크리스틴은 그래도 이야기는 또박또박 이어 나갔다.

그녀가 그래도 있는 원초적인 슬픔과 진솔한 얘기는 어느 한 구석에서도 창녀로서의 천박함을 발견해낼 수 없었다.  

이날 새벽 해장술판의 분위기는 창녀 크리스틴의 생애가 안주가 되어 그렇게 숙연해질 수밖에 없었다.  

“이 생활에서 당하는 괴로움이 꼭 한 가지 있어요. 매월 월말이면 두 사람의 근로자가 봉급을 받아 쥐고 저를 찾아옵니다. 두 사람 모두 긴 밤손님으로 제 곁에 오래 남아 있기를 원하기 때문에 늦게 오는 어느 한 사람은 쓸쓸한 마음으로 돌아가야 해요. 돌아가는 그가 불쌍해요. 나를 처음으로 짓밟고 간 그들을 위해 이렇게 창녀가 되었는데 왜 누구는 남고 누구는 돌아가야 합니까.”  

드디어 크리스틴의 넋두리는 울음으로 변했고 우리 셋은 그녀의 통곡을 막을 수 없었다.  

한참 후에 가까스로 울음을 그친 크리스틴은 우리를 어느 외로운 손님이 하룻밤을 머물다 간 그녀의 방으로 안내하여 커피 한 잔을 대접했다.  

방 안을 휘둘러보니 낡은 비닐가방 하나가 크리스틴의 생애처럼 놓여 있었고 벽에는 ‘생활이 그대를 속이더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고 씌어 있는 푸쉬킨의 싯귀가 액자가 되어 걸려 있었다.  

우린 그곳을 벗어나 「해뜨는 집」의 크리스틴의 영원한 처녀성을 위해 다시 한 잔의 축배를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