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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2

[좋은수필]송(松)부인 / 조현태

송(松)부인 / 조현태

 

 

 

나는 은근히 심통이 났다. 아내에게 같이 가자고 슬슬 구슬려 봤으나 또 거절당했기 때문이다. 혼자 나서는 길에서 애꿎은 음료수 깡통을 걷어찼더니 죽는 소리를 내지르고 나뒹굴었다.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도음산이 있다. 산에 간다고 따로 준비할 필요 없이 자투리 시간이 나면 언제든지 올라가 볼 수 있는 가까운 산이다. 그날도 함께 가지 못하는 발걸음이 적지 않게 불만스러웠지만 나를 달래며 올라갈 수밖에 없었다.

올봄에는 비가 자주 와서인지 골짜기 물이 제법 넉넉했다. 면경 같은 개울에 피라미, 버들치들이 도망가고 따라가며 연애놀이를 했다. 이제 피어나는 연초록 잎사귀들도 함께 어우러져 놀고 있었다. 속살거리는 물결 사이로 노니는 물고기들을 만져 보고 싶었지만 그들에게는 내가 두려운 불청객이란 생각이 들어 손끝도 적시지 못했다. 나도 덩달아 즐거워하며 구경만 하다가 일어났다.

잠시 그들에게 잃어버렸던 정신을 가다듬고 산등성이로 향했다. 기슭에는 부드럽고 향긋한 산나물들이 싱그러운 윤기를 자랑하고 있었다. 아직 솜털이 보송한 산초 순 하나 잘라 입에 넣고 잘근잘근 씹어 봤다. 초벌 미나리만큼이나 상큼한 맛을 지니고 있었다.

산등성이에는 우리 집 지붕만큼 큰 바위가 눌러앉아 있었다. 철쭉, 싸리, 두릅나무들과 어우러져 있는데도 심심하다는 눈치였다. 그렇다면 나도 쉴 겸 바위와 조금 놀다 가야겠지. 맨몸으로 올라가기에는 무척 까다로웠지만 애써서 올라갔다. 바위 위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지나가는 바람을 불러 앉히고 괜한 시비를 걸었다. 그래도 능청스러운 바람은 싫어하는 기색이 없다. 오히려 나를 포옹하며 은근슬쩍 감싸 주고 지나갔다. 이번에는 바위에다 손나발을 만들어 고래고함을 질렀다. 몸집이 굵고 무거운 아내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덩치만 커 가지고 움쩍도 못하고 엎드려 있으니 심심한 게 당연하다”고 있는 힘을 다하여 고함치고 나니 속이 후련해졌다. 훨씬 더 가벼워진 기분으로 일어나 정상을 향하여 올라갔다.

나도 모르게 흥얼거리며 가벼운 발걸음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발과 팔은 콧노래 박자에 따라 리듬을 타는 움직임이었다. 그렇게 거침없이 정상에 도착하니 확 트인 하늘에 내가 묻힌 기분이었다. 저 멀리 형산강 줄기가 꾸물꾸물 기어가고 있었다. 울산 부근 인내산에서 발원하여 저기까지 오면서 몹시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강은 비록 지치고 굼뜨지만 양 옆으로 제 몸통의 수천 배도 더 넓은 들판을 적시고 지나는 모습이 대건해 보였다. 논과 밭머리에는 새참 먹을 때 꼭 필요할 것 같은 수양버들과 미루나무가 열심히 그늘을 만들고 있었다. 더울수록 더 진한 그늘을 깔아 주는 나무들에게 고맙다는 표현으로 손짓해 보였다.

가끔 산꿩이 화려하고 긴 꼬리를 자랑하며 초라한 나를 비웃고 날아갔지만 아니꼽거나 억울하지는 않았다. 다람쥐나 청설모의 발 빠른 움직임도 왠지 느긋하게 느껴졌다. 하늘은 하얀 새털구름을 가볍게 두르고 있어서 순색 하늘보다 더 깨끗하게 보였다. 거기에다 손톱반달만큼 작은 비행기가 두 줄기의 꼬리를 길게 뽑아내며 여유 있게 날아가고 있었다.

정작 오늘처럼 가까운 산에 올라 좋은 경치를 즐겨야 할 사람은 내가 아니라 아내다. 아내는 환청 때문에 자주 스트레스를 받는데 그때마다 뭔가를 먹는 버릇이 있었다. 그러다 보니 늘어나는 체중을 다스리기 위해 걷기 운동을 했다. 운동을 시작한지 보름도 넘기지 못하고 무릎 관절이 아파서 운동을 포기하고 말았다.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체적 활동을 힘들어하며 체중을 줄이지 못하는 악순환을 하고 있다. 나는 아내가 과체중 때문에 다른 질병으로 건강을 무너뜨릴까 봐 걱정이 되어 늘 노심초사하고 있다. 그리고 덤으로 이 기막힌 볼거리와 느낌이 있는 곳에 아내도 함께 왔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싶었다.

이제 뭘 할까 자문하며 늙은 소나무 아래 쪼그리고 앉았다. 이 튼실한 소나무가 아내라면 얼마나 좋을까. 그래, 차라리 여기서 아무도 모르게 이 소나무를 아내로 가정하자. 성씨도 송씨니까 송부인이라 해야겠다. 그렇게 마음이 정해지자 소나무에게 큰 소리로 마음껏 야단을 쳤다. 체지방 덩어리만 잔뜩 채워서 매일 집에만 틀어박혀 있지 말고 이런 곳에 좀 다녀라. 경치도 좋고, 공기도 좋고, 더불어 기분도 좋고, 얼마나 좋으냐. 소나무 허리께에 짜증스럽게 발길질을 했다. 움쩍도 하지 않고 아프다고 앙살도 부리지 않았다. ‘나도 알고 있으니 너무 구박하지 말아 달라’고 울먹이는 아내의 모습 같다. 나는 슬그머니 미안해졌다. 오히려 내 발만 얻어맞은 것 같은 아픔을 느끼며 내려놓지 못하는 발을 어루만졌다. 엉뚱하게 투정을 부려도 아무 것도 달라진 것은 없고 발만 얼얼했다. 야단치다가 금방 미안해진 내 얼굴을 쳐다보며 돌멩이 하나가 겸연쩍지 않느냐고 물었다. 머쓱해진 나는 돌멩이를 주워서 멀리 던져버렸다.

아차! 혹시 그 돌멩이가 떨어지면서 낮잠 자는 산토끼나 고라니가 맞을 수도 있지 않을까 싶어 흠칫 놀랐다. 만약에 그렇다면 그 맞은 짐승은 얼마나 억울하고 아플까. 순간 무심코 던진 돌멩이에 맞은 고라니와 너무 구박하지 말아 달라고 울먹인 송부인이 겹쳐졌다. 내가 던진 과격한 말과 발길질이 송부인에게 돌멩이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짐짓 후회할 뻔했으나 돌멩이가 산기슭으로 떨어져도 아무런 반항의 조짐이 없어서 큰 다행이었다.

내 맘대로 될 일이 아니니 있는 그대로 인정하자며 그냥 내려 오기로 했다. 화끈하게 달아오른 노을빛을 양손에 거머쥐고 까불까불 산 아래로 향했다. 마치 저 멀리 보이는 강이 온갖 것을 다 아우르며 흐르듯이 그렇게 스스로를 달래고 쓰다듬어 위로 하면서 내려왔다. 소나무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떡갈나무의 참지 못하는 웃음이 집 앞까지 따라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