꿀맛 / 이남희
앞뜰에 살구꽃과 찔레꽃이 화사하다. 벌들은 꿀을 따느라 사람의 왕래도 모른 척한다. 남편이 귀농 공부를 조금하고 귀촌을 시작한 지 두 해째다. 금강 하류가 건너 보이는 곳에서 농사꾼 흉내를 내는 중이라고나 할까. 언 땅이 녹으면서 밭고랑을 오가는 농군들의 발길이 잦아진다. 땅속에 갇혀 있던 생명들도 쟁기질로 고물거리며 쇠스랑을 따라 기지개를 켜고 있다.
작년에 남편은 서 영감의 권유로 벌통 3개를 사들였다. 콩과 부추, 파, 옥수수 등을 심고 양봉을 시작하면서 사부자기 농사꾼이 되어갔다. 어느 날 남편은 벌에 쏘여 얼굴이 퉁퉁 부은 망측한 사진을 메일로 보내왔다. 얼굴이 두 배만 해지고 푸르딩딩한 것이 사람인지 괴물인지 모를 사진을 보자니 만감이 교차했다. 나한테 어쩌라는 것인지. 벌과의 동거를 쉽게 결정한 게 잘못이라 생각했겠지만, 남편은 면역이 생기면 괜찮아 질 거라고 가볍게 말했다.
며칠 후 내려가 보니 뜰안은 이꽃 저꽃 넘나드는 별 소리로 넘쳐났다. 벌들이 반경 2킬로까지 원정을 가서 꿀물을 물어온다는 소리를 하며, 남편은 무방비 상태로 벌통을 돌보고 있었다. 나는 몰려다니는 벌들을 피해 다니느라 곤혹스러웠다. 다행이 부엌 안으로는 들어오지 않았다.
그로부터 달포가 지났다. 벌통에 꿀이 찼다며 남편이 도움을 요청해 왔다. 벌통 한 개에 벌집 판이 8개 정도 들어가는데 초보자로서 벌통 3개를 채취하려면 일손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벌에 쏘였던 남편의 얼굴이 떠오르면서 와락 겁이 났다. 온통 벌에 점령당한 내 모습을 상상하니 적이 긴장이 되었다. 그러나 방충망 모자와 장갑. 아래위 긴 외투로 겹겹이 입고 장화를 신으면 걱정 없다는 남편의 말을 믿기로 하고 다시 내려갔다.
벌통을 습격하려면 별들이 일을 나가기 전인 이른 아침을 노려야 한다. 나도 완벽하게 복장을 갖추어 입었으나, 장화 입구가 큰 것이 좀 꺼림칙하다. 눈앞에는 그물이 처지고 안경을 쓸 수 없으니 안개에 휩싸이듯 시야가 흐리다. 옷을 덧입어서인지 목덜미와 이마에서 땀이 흐른다. 벌 앞에서 벌벌 떨고 있는 내가 안돼 보이는지, 서 영감님이 망 투구를 쓴 내 모양이 그럴싸하다고 짐짓 추켜세운다. 서 영감님이 벌통에서 벌집을 꺼내 드니, 귀가 멍멍하도록 벌들이 아우성이다. 얼결에 당한 녀석들이 새까맣게 덤벼든 것이다. 벌집을 제대로 쑤신 모양이다. 제집이 송두리째 습격당했으니 오죽하랴! 집안은 온통 성난 벌떼 소리로 난장이다. 어떤 녀석들은 옷 위로도 벌침을 놓는지 간혹 따끔거린다. 하지만 부어오르는 기색이 없자, 왠지 슬슬 겁도 없어진다. 눈을 상하 좌우로 돌리며 그것들의 필살기를 살핀다. 조밀한 망 벽을 뚫지 못하면서도 죽기 살기로 덤벼드는 용기가 가상하다.
서 영감님이 봉긋한 벌집 판 위를 밀도로 능숙하게 베어내 주면 어기적어기적 걸어가 남편에게 전달한다. 장갑 낀 손이 꿀범벅이 되지만 그것은 그림의 떡이다. 맛을 보기 위해 망 밖으로 입을 내놓은 순간에 얼굴은 벌 밥이 되고 말 것이기에.
벌 한 통에 여왕벌 한 마리가 존재하는 그들의 세계는 역할 분담이 분명하다. 일벌은 원래 암컷의 유전자를 지니고 태어나나, 로열젤리만 먹고 자란 여왕벌에 밀려 중성으로 살아간다. 수벌은 교미를 마치면 집에서 쫓겨나 떠돌다가 노숙자 신세가 되고 만다. 일벌은 여성성을 잃어버린 채, 여왕벌의 먹이 만드는 일을 운명으로 여기며 평생 꿀을 딴다. 일벌들은 한 모금씩 따온 꽃물을 날개치기로 이레 정도 말려서 꿀을 만든다. 힘든 노동으로 잘 농축시킨 꿀을 벌집에 넣어 밀랍으로 봉하여 저장한다.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엉뚱한 놈이 챙긴다고, 우리가 그것을 쓱싹하는 것이다. 남편이 벌을 잘 보살핀 정당한 대가이지만 벌의 입장에서는 청천벽력이 아닐 수 없다. 벌의 먹거리 정도만 남겨두고 싹 훑어가다니…. 마음 한쪽이 찔끔하다. 남편이 벌집 판을 원심기에 채워 넣고 손잡이를 돌려 꿀을 받아낸다. 그의 입가에 웃음이 번지고, 원심력에 의해 흘러나온 꿀이 말 통에 그득 채워진다. 채취된 꿀 속에는 밀랍 파편들과 함께 자기 집을 지키려다 죽은 별들의 시신이 여럿 섞여 있다.
동물의 세계는 철저하게 약육강식이다. 인간의 먹이사슬 구조도 질서있게 포장되어 있을 뿐 그들과 별반 다를 게 없다. 벌집에 갇힌 듯 단단하고 촘촘한 삶의 그물에 갇혀 살아가는 사람들이 허리를 쉽게 펼 수 없는 까닭이다. 벌들이 순식간에 집과 식량을 잃는 일은 천재지변처럼 그들에게도 불가피한 일이다. 약자의 모반이 쉽게 허락되지 않는 형세이다. 오로지 여왕벌을 장 모셔야 하는 일념에서일까. 길들여진 벌들이 분연히 일어서는지 벌통 근처가 요란해진다. 다시 살아가기 위함이다. 여왕벌은 사실 통치권자가 아니라 산란을 위해 일벌에게 사육되는 존재라는 것을 알기나 할는지.
꿀은 일벌의 신성한 노동으로 녹여낸 성물이다. 그것은 여왕벌의 근엄한 산란과 일벌들의 몽매한 순종으로 얻어진다. 우리는 문지기 벌들과의 전투 끝에 그들의 성물을 전리품으로 취하는 것이다. 강자의 몫으로 챙겨진 꿀은 벌의 혈흔인 양 끈적이며 오래도록 달콤하다. 목덜미까지 막아주던 방충망 모자와 두꺼운 옷을 벗어낸다. 날아갈 듯 눈앞이 훤해지고 몸이 가벼워진다. 이제 꿀맛을 볼 차례다. 장갑을 벗고 손가락을 쿡 찍어 올리려는데 난데없이 벌이 날아든다. 두 눈 Em고 그 꼴 못 보겠다는 것일까. 남편이 얼른 부엌으로 피하라고 소리친다. 정작 꿀맛 보기는 쉽지는 않았다. 여왕벌의 권위는 일벌의 필살기로 유지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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