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렌치키스와 파리의 피갈거리 / 김현정
사랑의 표현은 적나라할수록 쉽게 눈길을 끈다.
길을 걷다 우연히 마주치는 닭살 커플이나 야한 광고를 보면 나는 민망한 줄도 모르고 몇 번이나 흘끔거린다. 서양 사람들은 익숙해서인지 자기와는 상관없다는 듯 덤덤한 표정이고 우리나라의 젊은이들도 얼른 외면해주는 편이지만 나는 그러질 못한다.
이처럼 세련되지 못한 내가 소위 낭만의 도시라는 파리에 머물게 되자 볼만한 구경거리가 꽤 많았다. 2008년 가을, 콩코드 광장 남쪽의 파리 7구에 집을 얻어 두 달 남짓 체류할 때였다. 집 위치가 시내 한복판인지라 대문만 나서면 시티투어용 버스가 수시로 지나다녔는데 2층 오픈버스 위에는 감정에 들뜬 관광객들의 진한 키스신이 자주 눈에 띄었다. 집 앞 센느강의 알렉상드르3세 다리를 오갈 때면 마주 안고 떨어질 줄 모르는 영화 속 주인공 같은 남녀의 사랑행위를 수없이 훔쳐봐야 했다. 벌건 대낮에 잔디밭에 포개누워 버젓이 사랑을 속삭이는 과감 커플도 꽤나 볼만했다.
유태인과 게이의 거리로 소문난 마레지구에 갔다가 조각처럼 예쁘게 생긴 청년들이서로 엉덩이를 쓰다듬고 농밀한 입맞춤을 나누는 장면을 보았을 때는 극도의 호기심이 생겼다.
‘프렌치키스’가 깊은 입맞춤을 의미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건만 ‘프렌치 포스트카드’가 야한 사진을, ‘프렌치레터’가 콘돔을 의미한다는 것은 나중에야 알았다. ‘프렌치’가 들어간 단어가 이런 의미로 쓰인다면 프랑스인들의 성(性)문화는 얼마나 자유분방한 것인지 궁금증이 일지 않을 수 없었다.
자유분방한 사랑의 표현이라면 루브르 박물관의 고매한 예술작품보다는 피갈거리의 에로틱한 진열장 속에 그 진면목이 담겨 있을 것 같았다. 세계적인 예술의 도시, 우아한 문화의 도시로 이름난 파리에서 내가 구태여 피갈거리의 환락가와 에로틱 박물관을 찾게 된 까닭이라면 까닭일 수 있었다.
파리 에로티시즘의 사랑방격인 피갈거리는 공교롭게도 ‘순교자의 언덕’이란 뜻의 몽마르트 아래에 위치하고 있다. 물랭루즈의 빨간 풍차가 관광객을 오라고 손짓하고 어둠이 내리면 휘황한 조명이 꽃보다 화려하게 피어나는 환락의 거리이다. 블랑쉬 역에서 피갈광장을 향해 걷다보면 양 옆으로 에로틱 상점이 즐비하고 도발적인 차림의 여인들이 바에서 서성인다. 몇 년 전까지 포르노 상영관이 들어차 있던 자리에 지금은 시대의 헤테로인지를 구분하여 따로따로 DVD와 성인용품을 정리해 놓은 상점을 들여다보자니 동성애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쉽게 짐작이 갔다.
살바도르 달리가 엿보기 구멍을 통해서 성애 행위를 구경하며 자신의 성적 욕망을 달랬다는 곳, 그와 유사한 솝(deep show shop)이 몇 군데나 늘어서 있다. 미국에서 건너온 피츠제랄드가 방탕한 아내 젤다 세이어와의 성적 불화를 고민하며 방황했을 거리, 아편을 즐기던 게이 시인 장 콕도가 몽상에 빠져 침잠했을 카페 풀루즈 로트렉이 창녀들과 함께 생활하며 그림을 그렸다는 창녀촌, 소설가 그레이엄 그린이 드나들며 작품의 착상을 얻었다는 매음굴, 이 모든 곳들이 피갈거리의 홍등가에 집결되어있다.
피갈 광장을 지나 에로틱 박물관으로 들어갔다.
그곳에는 세계 각지에서 수집한 그림, 조각, 도자기 등이 자유분방하게 성을 표현하고 있다. 가벼운 현대 작품에서부터 역사속의 희귀한 소장품들까지 다양하게 진열되어있다. 흥미로운 점은 시대를 거슬러 올라갈수록 성에 대한 행위가 더 과감하고 솔직하게 표현되어 있다는 것이다. 중세시대 이전에는 그만큼 억압이나 수치심이 없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성의 추구는 자연스럽고 거짓 없는 본능이다.
플라톤의 대화록<향연>에서 아리스토파네스가 말하는 에로스란 ‘완전성에로의 욕구’가 아니던가? 인간은 원래 남성과 남성, 여성과 여성 그리고 남성과 여성이 붙어있는 세 가지의 성이 있었다. 그러나 남녀가 붙어있던 양성(兩性)의 힘이 강해지자 위협을 느낀 제우스 신이 강제로 인간의 몸을 갈라놓았다. 그러자 인간은 한 몸이었던 자신의 반쪽을 갈망하여 끊임없이 하나 되기를 추구하게 되었는데 그것이 곧 에로스라는 것이다.
반쪽짜리 불완전한 존재로스의 절대고독. 그걸 위로받을 수 있는 인간 차원에서의 해소책은 짝짓기이다. 그렇기에 성의 추구는 불가피하다. 성에 대한 표현 또한, 종교에 반한다거나 저속하다는 이유로 아무리 금기시하였어도 결국 어느 구석에선가 남아서 이렇듯 전해져오고 있는 것이다. 이런 에로틱 작품을 만든 사람들은 그걸 만드는 순간, 쥐뿔이나 예술성 높다는 그림이나 조각들 보다 자신의 작품이 훨씬 내밀하게 사랑받을 것이란 확신이 있었는지 모른다. 얇은 대나무 껍질이나 상아 위에 에로틱한 모습을 정교하게 조각하여 땀을 흘렸을 그들에게도 나름의 당당한 작가정신이 있지 않았을까 상상해본다.
사랑의 표현에는 은유적인 방식도 있지만 길거리 키스나 에로틱 작품처럼 원색적인 방식도 있다. 어느 쪽이건 아리스토파네스가 말하는 잃어버린 반쪽을 추구하는 ‘완전성에로의 욕구’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그 반쪽이 선한 반쪽일 때에만 욕구될 가치가 있다’고 부연하고 있다.(‘지혜와 덕’을 지향하는 소크라테스의 정신적 이론에 대해서는 여기서 논외로 하였다.)
파리의 홍등가를 빠져나오며 나는 중얼거렸다. 사랑은 그 표현 방식이 문제라기보다 추구하는 반쪽이 과연 가치 있는 반쪽인지가 중요한 문제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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