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와 가끔 / 김향남
옆자리는 아직 비어 있다. 출발 시간이 좀 남아 있으므로 곧 임자가 나타날지도 모르지만 빈자리 그대로 내 가방이나 올려 뒀으면 좋겠다. 내 의중과는 달리 한 남자가 앉았다. 희끗희끗 백발이 섞인 중년의 남자였다. 물론 나는 그를 정면으로 쳐다보는 일 따윈 하지 않았다. 아주 무심하게 창밖을 보면서, 뽑아온 커피를 홀짝거렸을 뿐이다.
버스는 시내를 벗어나 고속도로를 달리기 시작했다. 나는 커튼을 밀어붙이고 창밖의 풍경에 열중했다. 변변히 꽃구경도 못했는데, 이제라도 챙겨봐야지. 꽃잎 흩날리고 녹음 퍼지는 것을 나 몰라라 하는 것은 도리가 아니다. 한 자락 자유만 있다면 스치는 바람에도 풍류를 지어 낼 수 있다고 선인들은 말하지 않았나. 가난하고 고달프다 해도 그 흐름에 응답할 줄 아는 것이 삶에 대한, 자연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라고 했거늘…….
달리는 차 안에서 바라보는 산천경개는 화려했다. 고르지 못한 날씨라 해도 싹은 트고 꽃은 피어서 이꽃 저꽃 색색이 고왔고, 옅으락짙으락 보기 좋게 어우러진 초록은 말 그대로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그러나 주마간산(走馬看山)이라, 게으른 선비 책장 넘기듯 휙휙 지나치는 풍경은 그리 감동적이지 못했다. 게다가 나는 마음이 바빴다. 다음 시간이면 당장 내 차례인데 아직 다 읽지도 못했으니 편할 리가 없었다. 가방 속의 책을 꺼냈다.
그런데 무슨 책이 이렇게 두서가 없는지 모르겠다. 독자에게 대한 배려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다. 종횡무진 잡설을 늘어놓은 것 같아 맥을 잡기도 어려웠다. 거기다 또 두껍기까지…. 서투른 목수가 연장 탓한다더니 내가 그 꼴이었다.
내가 이러쿵저러쿵 낑낑대는 동안 옆자리의 남자는 전화도 하고 책도 읽었다. 통로 옆이라 창 쪽으로 시선을 두기도 마땅찮고 그렇다고 시종 책만 들여다보기도 지루했을 터, 그는 몇 장을 휘리릭 넘기기도 하고 어떤 쪽에서는 생각에 잠긴 듯 멈춰 있기도 하였다.
주머니 속의 전화가 바르르 울렸다. B였다. 어디 학교야? 아니, 시험기간이라서 휴강이야. 나 지금 어디 가고 있는 길이어서…. 나중에 전화할게. 나는 그녀에게 서울에 가고 있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만나자, 어쩌자 번거로워지면 안 되었다.
차는 휴게소에 닿았다. 화장실에도 가고 뜨거운 커피도 마셨다. 시간이 좀 남았지만 나는 일찌감치 차에 올랐다. 그러나 아무리 해결해야만 하는 숙제라고 해도 또 책을 펼치고 싶지는 않았다. 무연히 앉아 있는데, 남자가 들어왔다. 그는 생글거리며 커피를 내밀었다. 봉지 속에는 얼핏 두 종류의 음료가 각각 두 개씩 들어 있는 것 같았다.
“커피 한 잔 하시겠습니까?”
나는 거절했다. 방금 전 마신 뜨거운 커피가 채 내려가기도 전인데, 온몸에 하얀 성에를 두른 차가운 캔을 들라니, 내키지도 않았다.
“그럼 이거라도.”
다시 옥수수를 내밀었다.
“아니요, 괜찮습니다.”
“그럼 가지고 있다 나중에 드시지요.”
이런 무례가 있나. 그것은 벌써 내 무릎 위로 건너왔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이어진 질문은 나를 당황하게 했다.
“저, 선생님. 대학에 계신가 보지요? 저도 한때 그런 적이 있습니다만.”
그는 내 통화내용을 들었음에 틀림없다. 학교? 휴강? 이런 단어들을 들었을 것이다. 무릎 위에 놓여있는 두꺼운 책도 한 몫을 했겠지. 하여튼 선생님이라는 호칭이야 보통명사처럼 쓴다 해도 나를 대학에 계신 진짜 선생님으로 생각한다는 건 그리 기분 나쁜 일이 아니었다. 아주머니도 아니고 선생님이라니, 그것도 대학…. 나는 그만 대답을 놓치고 말았다. 그가 무슨 말을 한들 별로 응대할 마음이 없기도 했지만, 굳이 내가 늦깎이 학생이라는 사실을 밝혀야 할 필요도 없었다. 그는 이제부터가 시작이라는 듯 들고 있던 책을 차르르 넘기면서,
“베르디 아시지요? 이탈리아 음악가.”
“아, 오페라 <아이다>.”
“네, 오페라 <아이다>를 비롯해 <리골레토,> <춘희> 등 대단한 명곡들을 많이 남겼지요. 근데 그분 굉장히 열정적인 사람이더라고요. 워냐면, 베르디가 살았던 당시는 평균수명이 50세에 불과했는데, 그때 80세의 노인이었던 그 양반이 <팔스타프>라는 오페라를 작곡했어요. 기자가 물었답니다. 당신은 이미 음악가로서 최고의 명성을 누리고 있는데 왜 이렇게 어려운 오페라를 작고했느냐고요. 베르디가 대답했죠. ‘음악가로서 나는 일생 동안 완벽을 추구해 왔다. 완벽에 도전할 때마다 늘 아쉬움이 있었고, 그때마다 한 번 더 도전해 볼 의무를 느꼈다.’라고요.”
그는 자신이 곧 베르디라도 된 듯 흐뭇하게 웃었다. 그의 말은 다소 장황했고 나는 절대로 끼어들고 싶은 마음이 없었지만, 그렇다고 무시 하지도 못했다. 몇 마디 응수가 더 오갔다. 그는 눈치가 빨랐다. 내 어깨 너머로 그는,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꿰뚫고 있는 것 같았다.
“아, 그럼 작가분이시군요. 저한테도 좀 보여 주시겠습니까. 아주 큰 영광으로 알겠습니다만.”
그는 곧장 핵심을 찾아 본론으로 들어서고 있는 듯했다. 그 순간 나는 또 대답을 놓치고 말았다. 낭패였다. 도둑질을 한 것도 아니고 없는 말을 지어낸 것도 아니고, 다만 대답을 비켜갔을 뿐인데 뒤통수는 왜 이리 가려운가. 차는 계속 달리는 중이라 내릴 수도 없고 나는 좌불안석이었다. 남다가 금방이라도 눈치 채고는 풀풀 웃어댈 것 같았다.
나머지 시간들은 지루했다. 그는 계속해서 열정과 도전에 대해 말했고 알고 있는 작가들을 들먹였다. 그리고 그는, 누군가와 가끔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그렇지 않느냐, 동의를 구해 왔다. 나는 애매하게 웃었다.
이윽고 차가 멈춰 섰다. 승객들은 일제히 출구를 향했고 나도 일어섰다. 차 안은 공연이 끝난 무대처럼 녹지근한 피로가 배어 있었다. 그는 염함을 꺼내려다 말고 수첩을 뜯어내어 내게 주었다. 거기엔 열한 개의 숫자만 일렬로 나열되어 있을 뿐 이름은 없었다. 나는 총총 버스를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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