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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2

[좋은수필]이기대에서 듣는 피리 / 김새록

이기대(二妓臺)에서 듣는 피리 / 김새록

 

 

 

이기대(二妓臺)  바닷길을 거닐 때였다. 피리를 부는 소리가 들려와 가는 걸음을 멈추었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그럴만한 일은 없을 것 같은데 분명 그것은 피리소리였다. 가만히 보니 바위를 때리는 파도가 하얀 물방울이 되어 허공으로 치솟아 수천 개의 은방울들의 환호성이었다. 개선장군처럼 몰려온 파도와 갯바위가 서로 만나자 와락 껴안고 스킨십을 하는 사랑의 하모니가 피리소리로 들린 것이다.

바위의 품속으로 안겨드는 하얀 파도도 있다. 그럴 때 마다 바람은 물방울과 어울려 일대 춤사위를 부추긴다. 바위 끝으로 성큼 치솟아오르는 빗살무늬 같은 포말은 무지개 같은 곡예를 망사 저쪽에서 연출한다. 햇빛이 파도의 윤무에 덩달아 조명을 깐다. 순간 무지개가 허공을 차지한다.

분위기를 돋우려는 듯 젊은 선남선녀가 경쾌한 리듬으로 춤사위를 곁들이는 장관이 눈에 떠오른다. 장자산은 늠름한 남성상이다. 장엄한 관악에 맞추어 피리를 부는 듯 아늑한 곡조가 연상되는 옴팍한 산이다. 산자락 아래 바다는 또 다른 푸른 소매를 나부끼며 하얀 치아를 드러내고 차르르 웃어대는 아리따운 여인의 모습이다. 한판 신들린 놀이판은 보는 눈과 귀를 즐겁게 한다.

어느 날은 이기대(二妓臺) 산책길에서 두 기녀(妓女)를 만나는 환상에 뜬다. 조금 전에 듣던 휘파람소리는 두 기녀가 목청껏 뽑아 올리던 육자배기 가락인지도 모른다. 어느 대목에서는 피를 토하는 듯하고 또 어느 대목에서는 자지러지게 허리를 꺾었다. 아슬아슬한 낭떠러지를 붙잡고 목청껏 울부짖는 파도소리가 된 기녀인지도 모른다.

들뜬 마음을 가라앉히라고 깡마른 나무 삭정이가 툭풀덤불에 떨어진다. 가던 걸음을 멈추고 삭정이가 떨어진 자리를 살핀다. 영화장면의 변화처럼 이번에는 납작하게 엎드린 마른 풀잎이 시선을 붙잡는다. 갯바람에 몸을 흔들면서 나를 빤히 보는 것 같다. 파도소리에만 정신을 팔지 말라고 작은 소리로 속삭이는 마른 풀잎은 그대로 언덕에 퍼져 앉았다. 삭정이를 소재로 한 그림을 생각하기도 한다. 한 생을 즐기는 갈대의 춤사위가 소복을 입고 한풀이를 하는 영상이 스쳐간다. 어떤 풀덤불은 낯설다. 엉클어진 건초의 이름을 기억한다는 것을 풀덤불이 알면 좋아할 것이다. 그래서 이름을 불러주는데 이름이 목에 탁 걸리는 것도 있다.

몰라줘도 개의치 않고 바닷바람에 흥을 돋운다. 미세한 울림이다. 지금은 녹슨 칼날처럼 그냥 엎드린 풀잎이지만 만지면 살을 섬벅 베기라도 할 듯 시퍼런 청춘의 한 때도 있었다. 찬란했던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현실을 순순히 받아들인 자세가 초연하여 좋다. 하찮은 풀이라고 업신여길 게 아니다. 자리를 탐내며 나만이 적임자라고 억지를 부리지 않는 비움의 초연한 자세를 배운다. 그 빈자리에 다시 새싹이 돋아나 싹을 틔우고 장자산과 이기대 바다가 어우러진 푸른 물결의 노래로 우렁찰 것이다.

길목에 서 있는 소나무가 나에게로 가지를 뻗어오는 듯하다. 소나무의 정기를 느낀다.

부산시 용호동 이기대.

내 안에서 또 다른 파도가 쿵 자지러지는 소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