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라일락 / 이 릴리안
언제나 신혼. 이것은 결혼 십여 년이 지난 우리 부부에게 주위 사람들이 해주는 의도를 알 수 없는 말이다. 이유야 많겠지만 오랜 세월 동안 보통의 부부들과는 다른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항상 새로움을 향해 가면서 다양성을 추구하고 싶어 하는 우리 두 사람의 삶의 자세도 그 이유 중의 하나가 될 것이다.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는 듯이 우리는 영어권에서의 삶에 도전을 하였다. 이 도전이 시련으로 되돌아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상태로 말이다. 그리고 실제로 간단한 가방을 챙겨 여행을 떠나는 기분으로 이민을 갔다. 그리고 캐나다의 명문 대학이 있는 작은 도시에 여장을 풀었다.
넓은 호수로부터 불어오는 이 지역 특우의 바람은 주변의 광활한 대지를 휩쓸며 우리 부부의 뜰에까지 몰아쳐 왔다. 그 해 가을의 이 거친 바람은 최후의 안간힘으로 매달려 있던 마지막 잎새마저 처절한 몸부림으로 떨어지게 할 정도였다. 특히 나를 휘감던 감성의 회오리바람은 벗어나려 애를 쓰면 쓸수록 더 강한 속도로 조여 오기도 했다.
이런 격정 속에서 언제 가을이 끝났는지도 모르게 겨울은 우리 앞에 서 있었다. 긴 겨울마저 다시 힘겨운 소용돌이 속에서 지낼 수는 없었다. 되풀이할 것이 아니라면 최소한의 변화를 실행해야 했다. 그래서 내가 그렇게 살고 싶어 하던 동네에 있는 언덕 위의 하얀 집으로 이사를 하였다.
윗동네 집들과 울타리 삼아 심어진 커다란 두 그루의 단풍나무는 겨울나무의 자태답게 제법 고고해 보였다. 그런데 거실에서 이어지는 덱(deck)의 한 모퉁이에 나무 한 그루가 더 심어져 있었다. 딱히 중심이 될 만한 굵은 줄기도 없이 밑동부터 갈라져 나간 가지들은 이층의 창문까지 닿을 정도로 퍼져 있었다. 다듬어지지 않은 채 제멋대로의 모습으로 가지만 남은 상태라 이름은 더더욱 알 수 없었다. 그다지 건강해 보이지도 않는 거무죽죽한 이 나무는 깊어 가는 겨울 내내 단풍나무의 기품과 선명한 대조를 이루며 초라한 모습으로 서있었다.
이곳의 겨울은 종종 이듬해 사월까지 이어지곤 한다. 아무리 길어도 겨울이 지나고 나면 봄이 오는 것이 당연 하겠건만 나는 봄을 기다리지 못하고 유럽으로 떠났다. 독일을 향한 그리움과 이곳에 혼자 덩그러니 남겨질 남편에 대한 미안함 두 가지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언제나 신혼인 모습도 한 때의 회오리바람도 그리움보다 더 절실하지는 않았다.
그 동안 우리는 한 달 정도는 서로 떨어져 지내본 적도 많았지만 이번에는 좀 달랐다. 시간의 길이가 훨씬 길다는 사실은 제쳐두고 마음의 간격이 전과는 달랐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내 마음을 시간의 흐름에 맡기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서 나는 타임머신을 타고 십여 년 전의 세계로 돌아가 자유와 낭만과 열망, 그리고 고독을 만끽하고 있었다. 화려한 계절 유럽의 한 가운데서 혼자만의 화사한 행복을 누리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은 이메일에 사진 한 장을 함께 보냈다. 우리 집 덱을 덮은 지금가지 이름도 모르고 있었던 나무 한 그루가 사진에 담겨 있었다. 마침 방금 비가 내리고 난 다음이라는 것을 볼 수 있도록 무성한 이파리들은 온통 방울방울 물기를 달고 있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함초롬히 피어 있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자그마한 꽃송이들이었다. 특히 내가 남편에게 즐겨 선물했던 색깔인 바로 그 짙은 보랏빛이 가득했다.
내 눈물은 이내 나뭇잎 위로 떨어져 물방울과 섞였고, 짙은 보랏빛은 뿌옇게 눈앞을 가리는 알 수 없는 슬픔이 되어 번져 갔다. 느낄 수 있는 건 단지 향기뿐이었다. 지난해 초여름 이 향기 맡고 싶어서 얼마나 애를 태웠었던가 해마다 이맘때면 훈풍에 실려 코끝을 간질이던 이 향기를 맡을 수 없었던 지난 해, 나는 얼마나 우리의 현실을 한탄했었던가.
아, 아! 당장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러나 마무리지어야할 학교 일들로 인해 현재에 충실해야 했다. 그 대신 시간을 내어 전에 우리가 살던 곳에 가보기로 했다.
비가 그야말로 외국어 표현을 빌지 않더라도 몹시 무겁게 쏟아지던 날이었다. 남편을 처음 만났던 곳에 나는 순례자가 되어 돌아와 있었다. 신혼 초에 살던 대학기숙사, 학교는 달랐지만 종종 남편을 기다리며 책장을 넘겼던 대학도서관, 그리고 남편이 걸핏하면 밤을 세우며 열정을 불살랐던 대학연구소에도 가보았다.
모든 것이 그대로였다. 아니 모든 것이 너무도 초라하고 작게 느껴졌다. 그러나 당시 이곳은 우리에게는 꿈의 공간이었었다. 이곳, 우리의 뜰에는 사시사철 라일락이 피고 있었고 나는 늘 그 향기를 흠뻑 맡으며 살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나는 이 자리에 혼자였다. 단지 그때에 피던 라일락꽃을 기억해 내고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여름이 끝날 무렵 나는 집으로 돌아왔다. 덱 모퉁이의 라일락꽃은 이미 낙화가 되어 흔적도 없고 나뭇잎만 무성해 있었다. 그렇지만 이제 나는 이듬해에 다시 꽃이 필 것이라는 것을 안다. 그리고 이 꽃의 향기는 변함없이 나를 매혹시키리라는 것도 안다. 또한 그 색깔은 언제나 보랏빛이라는 것도 안다. 그러니 이제 비로소 기다림을 안고 긴 겨울을 견뎌낼 수 있을 것이리라.
겨울에 이 나무는 주위에 쌓여 있는 흰 눈이 너무 눈부셔서 상대적으로 칙칙해 보일지도 모른다. 또한 균형 잡힌 단풍나무의 굵은 줄기에 비교되어 초라해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이 나무를 비교 상대로 삼지 않으련다. 나무에 모이통을 매어 좋으며 배고픈 겨울새들이 날아오길 기다린다. 나무에 대나무 풍경을 달아 놓으며 가지에 이는 바람소리가 내 마음에 스산하게 스치지 않기를 소망한다. 그리고 이따금 청설모가 눈 덮인 세상에서 나무를 오르내리며 노는 것을 무심히 바라본다. 나무도 나도 우리 부부의 삶도 지금 여기 이 자리에 있는 까닭이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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