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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2

[좋은수필]봄이 오는 길목 / 손숙희

봄이 오는 길목 / 손숙희

 

 

 

잠자던 대지가 깨어나고 있다. 얼음장 같던 콘크리트 냉기가 바람에 실려 날아가고, 가는 곳마다 흙냄새가 묻어온다. 노란 꽃망울을 터트린 산수유는 긴 동한을 견디고 양지바른 화단의 한켠에서 새봄을 알리고 있다.

가지마다 꼭꼭 박혀 움츠리고 있던 나무의 눈들이 이제 땅속의 온기를 받아 며칠 후 터뜨릴 꽃망울을 준비하느라 바쁘기만 한데, 발코니의 철쭉은 철 이르게 피어서 저희들끼리 바람결에 호들갑을 떨고 있다. 호접란의 긴 꽃대 끝에 팥알처럼 맺혀 나오는 꽃망울은 더욱 정겹다. 꽃이 피기 전에는 있는 둥 마는 둥 조용한 자태로 자리만 지키고 있다가 꽃망울을 보이기 시작하면 개화까지의 진통이 길다.

퇴근 후 지나는 길목의 난전에서도 봄나물의 향기가 풋풋하다. 가까운 산자락이나 들에 지천으로 돋아나던 냉이, 쑥, 달래 같은 푸성귀의 향이 물씬 코끝을 스치면 어쩔 수 없이 마음은 고향으로 내닫는다.

초등학교 2학년 겨울에 우리 가족은 산자락에 있는 변전소로 이사를 왔다. 집은 일본식이었으나 주변은 송 ․ 변전을 위한 기계들 외에는 모두가 자연 그대로였다. 읍내와는 한참 떨어져 있어서 사택의 대 여섯 가구 외에는 사람이 귀했던 변전소의 겨울은 아이들에겐 유배지나 다름없었다. 뒷산의 솔바람 소리와 윙윙 울어대는 전선줄, 변압기의 기계 소리를 지루하게 들어야 했던 겨울은 우울한 계절이었다. 읽고 또 읽어 외우다시피 한 교과서의 글자들, 을악책의 노랫말, 간혹 한 권씩 사다 주신 동화책도 수십 번이나 읽어 책장이 낡아버리던 계절이 아니었던가.

아이들을 위해서 집집마다 아버지들이 스케이트를 만들어 주기도 하고, 팽이를 깎거나 가오리연을 만들어 날리는 걸 도와 주셨지만, 날씨가 추운 날은 거의 모두 집 안에서 놀기가 일쑤였다. 물이 언 논에 가서 얼음지치기를 한다든가 목욕탕 불쏘시개를 찾기 위해 삭정이와 마른 솔잎을 주워 담으러 산에 올라가 산토끼를 만나는 일 외에는 신나는 일이 별로 없었다.

그러던 긴 겨울이 지나가고 해동이 되면 움츠렸던 몸과 마음을 펴고 산과 들을 마구 헤집고 다녔다. 겨울로부터의 해방감을 만끽하며 봄을 맞이한 것이다. 산자락에서 흙냄새를 맡으며 냉이를 캐고, 쑥을 뜯었다. 진달래꽃이 피면 산으로 올라가 꽃을 꺾었고, 작은 개울가에서는 버들강아지를 꺾어 버들피리도 만들어 붙였다.

봄비가 내리면 우리 집 텃밭에는 채소 파종이 시작되었다. 어머니는 손수 일구어 놓은 텃밭에 상추, 오이, 가지, 토마토, 고추, 옥수수 들 채소의 씨앗을 뿌렸다.

우리 가족이 먹고 가까운 이들에게 나누어 줄 만큼 심는 것이 봄철 행사였는데, 어머니는 거기에 가족들 건사하는 것만큼이나 정성을 쏟으셨다. 일에 대한 열정이 많은 성품 덕에 해마다 수확이 많았고 열매도 충실하였다. 하루가 다르게 열매가 굵어지면 오이와 토마토, 풋고추, 가지 열매들을 따면서 희열을 느꼈던 어린 시절의 체험은 살아가면서 얼마나 큰 힘이 되었는지.

봄을 맞는 것은 계절이 주는 아름다움을 향유하는 자리도 크지만 일상의 삶 속에서는 일의 시작이란 의미가 더 크다. 씨앗 파종으로 시작하여 추수를 하기까지의 과정에서 한 해 삶의 성취감을 얻으시던 어머니의 텃밭을 이 봄에 다시 일구고 싶다.

산수유가 꽃망울을 터뜨리고 개나리가 봉오리를 준비하고 있다. 새 학년을 맞고 새 교실을 찾아가며, 새로운 입지를 짜라 시작하는 계절이다. 새로운 일들이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다.

같은 나무에서 꽃이 피어도 작년의 꽃은 아니고, 씨앗을 뿌려도 작년의 그것은 아니다. 모체에서 빨아올린 물과 영양으로 잉태되어 새롭게 태어나는 이들과의 만남이다. 교정이 재잘거림으로 가득하여도 모두 새로운 언어들이며 새로운 환경에서 새롭게 창조하기 위해 준비해야 하는 시간이다. 지난해의 타성에서 벗어나 새로운 길목으로 인도되길 바란다.

프리지어 노란 꽃다발을 안고 현관을 들어오는 친구를 봄을 맞이하는 마음으로 반가이 맞아들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