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살 바른 곳 / 정호경
우리 집 베란다에는 야생화를 비롯한 자질구레한 꽃나무들이 화분에서 자라고 있는데, 그 가운데 1미터 높이의 철쭉은 한번 죽었다가 살아난 힘겨운 고비가 있어서인지 나에게는 다른 화초들보다 각별한 정이 가는 놈이다.
몇 년 전에 집을 비워두고 서울에서 한 달 남짓 있다가 왔더니 꽃은 고사하고 잎이 말라붙은 채 시들어 있었다. 마른 잎을 떼고 물을 여러 바가지나 떠다 부으며 철이 바뀌도록 기다렸지만, 살아날 기미가 보이지 않아 포기하고 말았다. 시든 나무를 뽑아 정리하는 것도 성가신 일이어서 큰 화분에 그대로 묻어둔 채 다음 해 봄 화분에 물을 주다가 우연히 보니 그 바싹 마른 나뭇가지에서 참새 새끼 주둥이 같은 노란 싹이 돋아나 있었다. 이렇게 하여 다시 목숨을 건진 철쭉은 매년 접시꽃만한 분홍색 꽃을 피우며 그 좁은 베란다를 환하게 만들어 주었다. 말라 죽은 그놈의 가지를 꺾어 보니 물기 하나 없는 연필 자루 같았는데 정말 기적이었다. 사람이나 가축이나 혹은 초목이나 한 식구로 정붙이고 살던 놈의 뜻하지 않은 변고는 마음을 더욱 아프게 한다.
거실 소파에 앉아 이른 봄의 그 연분홍 철쭉꽃을 바라보는 재미도 이제 10년이 되어간다. 그런데 그 긴 세월 동안 전혀 의식하지 못했던 새로운 사실을 오늘 아침 우연히 발견하게 되어 자연에 대한 경이와 정을 새삼 느꼈다.
“우리 집 철쭉꽃은 왜 매년 왼쪽 가지에서부터 피는지 모르겠어.”내가 무심코 말했더니 “그쪽으로 거름을 많이 빨아올리는 모양이지요.” 집사람의 말이었다. 그런데 베란다의 철쭉을 한참 바라보고 있던 집사람이 무슨 진리라도 발견한 듯 놀란 표정으로 내 팔을 잡아당겼다.
“저것 보세요. 이제 보니까 햇볕 때문인가 봐요.”
아침나절 베란다에 잠깐 들렀다 나가는 햇살의 놀이터는 다름 아닌 철쭉의 왼쪽 가지 언저리라는 사실을 이제야 알았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볕이 들지 않는 오른쪽 가지에서는 강냉이 알맹이만한 봉오리가 근 열흘이 지나도록 꽃을 피울 생각도 않고 있었다. 같은 아파트 베란다에서도 볕이 들고 안 들고의 차이였다.
지난 2월 중순에 일본 후쿠오카에서의 윤동주 62주기 추모제에 가는 우리 일행 중에 어느 회원의 이웃에 산다는 한 가정의 모자(母子) 세 사람이 우리와 동행했었다. 인천공한에서나 비행기 안에서도 우연히 어울리게 된 광광객인 줄로만 알고 있었는데 그것이 아니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어머니가 20대 초반의 딸과 그 아래의 아들을 데리고 온 일행이었다. 나는 둘 다 딸로 알고 있었는데, 동생인 아들이 여자아이처럼 꽁무니머리로 뒷머리를 묶었기 때문이었다. 문학카페 회원인 우리 일행이 후쿠오카 형무소 뒷마당에서 ‘윤동주를 사랑하는 일본인 모임’ 회원들과 함께 62주기 추모식을 올렸는데 먼저 국화로 헌화한 다음, 술을 따라 절을 하고 희망자는 누구나 제상(祭床) 앞에 나가 윤동주의 시를 낭송했다. 그런데 마지막으로 나온 그 남매의 걸음이 예사롭지 않아 옆 회원에게 물었더니 17,8세쯤 되어 보이는 장성한 아들은 앞이 잘 보이지 않는 시각장애인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는 시종 웃는 얼굴로 그의 누나와 나란히 서서 윤동주의 짤막한 시 <달같이>를 낭송했다.
연륜(年輪)이 자라듯이
달이 자라는 고요한 밤에
달같이 외로운 사람이
가슴 하나 뻐근히
연륜(年輪)처럼 피어 나간다.
그의 어머니는 시를 낭송하고 제자리로 돌아오는 장님 아들 손을 잡고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 뒷날 후쿠오카의 여기저기를 관광하는 곳에서도 아무 거리낌 없는 대화와 행동으로 우리를 편안하게 해 주었다. 후쿠오카의 ‘구마모토성[熊本城]’이 있는 ‘니노마루’ 광장에서 잠깐 쉬는 동안 그의 어머니와의 대화에서 그의 시각장애 아들의 사연을 듣고 마음이 아팠지만, 아들에 대한 그 어머니의 지극한 정성과 사랑에 놀랐다. 앞을 보지도 못하는 장님 아들을 제 나라도 아닌 타국에까지 데리고 다니는 일이 힘들지 않느냐고 내가 말했더니 그런 불편한 신체 조건일수록 많은 체험을 통해 견문을 넓히고 나아가서는 어려움을 극복하는 힘을 길러 주어 떳떳하고 건강한 사회인으로 키우고 싶다는 것이 그 어머니의 신념이자 소망이라고 했다. 어려서 열병에 걸려 시력을 잃은 그때부터 오늘까지의 답답하고 아픈 모정을 한 권의 책으로 써서 출판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상황이 절실하다 보니 쉽게 써졌어요.”
그의 어머니는 웃으면서 말했다.
“그렇지만 글재주가 없으면 안 되는 일이지요.”
나는 칭찬 겸해 한마디 했다. 구경하다 돌아온 아들은 나와 대화하는 그의 어머니 곁에 어린애처럼 붙어 서서 무엇인가 귓속말을 하고 있었다.
웅장한 자태의 ‘구마모토성’ 옆에 서 있는 고목 뒤로 기우는 늦겨울 오후의 햇살이 ‘니노마루’ 광장 편의점 앞 벤치에 앉아 이야기하고 있는 우리의 손등을 따뜻이 만져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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