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기다리자 / 전상준
수목원이다. 만발한 벚꽃이 연분홍 웃음으로 나를 맞이한다. 화창한 봄날이다. 여기저기 지각한 동백이 붉은 꽃을 달고 있고 개나리꽃도 피었다. 다사롭게 솔솔 부는 봄바람에 살랑대는 수양버들 가지 끝에도 연초록 물이 들고 있다.
초등학교 이 학년 일곱 명을 맡았다. 늘 해 오는 일이지만 언제나 새롭다. 때 묻지 않은 동심과 함께 이것저것 꽃 이야기도 하고 나무 이야기도 한다. 오늘따라 아이들은 내 이야기에 별로 관심이 없다. 옆에 있는 동무 옆구리를 툭툭 건드리며 장난이다. 겨우내 웅크리고 있던 아이들이 봄을 맞아 수목원에 오니 기분이 좋은가 보다. 지도가 잘 안 된다. 덩치가 조막만 한 아이가 자기보다 훨씬 더 큰 아이를 때려 울린다. 가만히 있는 동무를 울리면 벌을 주겠다는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자기는 때린 적이 없단다. 방금 내가 봤다고 하자 “아, 내가 때린 게 아니고 장난을 했잖아요.”하며 대수롭지 않은 일이란 듯이 생글거리며 웃는다. 한 아이는 울고 한 아이는 웃고 판단이 서지 않는다.
숲 속 양지쪽에 광대들이 무리 지어 붉은 자주색 꽃을 피웠다. 깨끗하고 맑고 곱다. 방금 동무를 때려 울린 아이에게 꽃 이름을 아느냐고 물으니 모른단다. 다시 “꽃이 예쁘지.”하고 물었다. 반사적으로 나온 대답은 “저게 뭐가 예쁜데요?” 하더니 쏜살같이 들어가 발로 짓밟아 뭉갠다. 말릴 사이도 없다. 순간 나는 푸른 하늘만 멍하니 쳐다봤다.
노인일자리사업단 ‘숲생태해설가’로 참여하고 있다.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쳐 본 경험이 있어 아이들 지도에 큰 어려움은 없다. 걱정은 늘 안전사고다. 모두가 제집에서는 소중한 자식이 아닌가. 행여 다치기라도 한다면 큰일이다. 싸움이라도 하면 지도하기가 참 어렵다. 가끔은 옆 동무를 괴롭히는 아이에게 “꽃이 보고 웃는다. 나무가 흉을 본다.” 며 애둘러 이야기해도 금방 말뜻을 알아듣고 웃으며 잘 따른다.
아침에 팀장이 예쁜 봉투에 든 편지 몇 장을 가져와 읽어 주었다. “선생님께 / 선생님 수목원에서 많은 꽃을 가르쳐 주어 고맙습니다. 벌과 꽃등에를 구별하는 법도 알았습니다. / ○○초등학교 2학년. 주○○ 올림‘ ‘선생님 안녕하세요. 저는 ○○초등학교 2학년 김○○입니다. 저번에 꽃과 나무 설명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선생님 때문에 모르는 것 알게 되었어요. 다음에 또 놀러 갈게요. 힘내세요.’
하늘색 종이에 연필로 꼭꼭 눌러쓴 글씨가 비뚤비뚤하나 정성이 가득하다. 겹으로 된 종이 안쪽에는 낙엽 모양으로 오린 분홍색 종이가 앙증스럽다. 편지를 쓴 아이들은 작년 늦가을에 다녀갔다. 편지는 지난 연말에 왔고, 겨울에는 숲 해설이 없어 소식을 받지 못했다.
서로 쳐다보며 웃는다. 칭찬의 효력은 나이를 가리지 않는 모양이다. 육십 중반을 넘긴 숲생태해설가 선생님들의 표정이 환하다. 하는 일은 간단하다. 유치원생이나 초등학교 저학년 학생에게 숲이 왜 있어야 하는지, 숲이 인간과 어떤 관계를 가졌는지, 숲 속에는 나무나 풀만 있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미생물부터 큰 짐승까지 함께 살아가고 있으며, 많은 물을 저장하는 저수지의 역할도 하고 있음을 알려 준다. 그리고 수목원에서 눈으로 볼 수 있는 수목의 종류, 풀의 이름, 각 나무의 풀의 특징이나 꽃의 구상, 나무의 잎과 줄기, 뿌리의 역할 등 숲에 대한 기본적인 것을 쉽게 설명하고 체험하게 한다.
꽃잎이 지고 있는 목련을 바라본다. 목련꽃은 꽃의 역할을 다 하고 시들었을까. 순백의 모습을 드러낼 때와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누렇게 뜬 색깔로 나무에서 떨어진 모습이 추하다는 느낌마저 든다. 오늘은 뒤따르는 아이들에게 신경이 더 간다. 머릿속에는 광대나물 꽃을 아무렇지 않게 두 발로 밟아 버리는 저 아이를 어떻게 지도해야 하나, 방법을 찾지 못해 고민이다.
빛과 물, 영양분을 충분히 받은 나무는 꽃이 탐스럽게 피고 열매가 충실하다. 그러나 그늘에서 빛을 받지 못하거나, 물과 영양 공급이 부족하면 시들거나 말라 죽는다. 아무리 소중한 아이라도 제때 물과 영양분을 주지 않으면 뿌리가 마르고 봄이 와도 꽃이 제대로 피지 않을 것이다. 어떻게 하면 물과 영양분을 줄 수 있을까.
그래, 기다리자. 오늘 읽은 편지를 쓴 이이들도 작년 수목원에 왔을 때 개구쟁이처럼 굴지 않았는가. 나는 정성스럽게 쓴 편지 뒤쪽에 서 계시는 선생님을 본다. 아이의 미래가 봄꽃처럼 활짝 피어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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