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봄날이 길어도 좋겠다 / 김민숙
새장에 갇힌 새, 요즘의 나를 두고 하는 말이다. 밖에서 들여다보는 사람들은 앞뜰에 봄빛이 한창이라며 갇힌 새를 측은하다고 한다.
생후 6개월 된 외손녀가 있는 우리 집은 종일 요란하다. 남편은 할미의 주접이 도를 넘었다고 나무라면서도 채 간 아이를 넘겨주지 않는다. 아이는 할미 손가락 길이의 발바닥으로 직립을 지향한다. 수도 없이 주저 앉았다 서기를 반복하는 노력에 함께해야 하는 나는 아이와 하나가 된다. 주저 앉는 것은 제 몫이지만 일으켜 세워야 하는 것은 내 몫이다. 아이는 지치는 기색이 없다. 저라고 힘들지 않으랴만 연습 없이 설 수도, 걸을 수도 없다는 것을 아이는 알아차린 모양이다. 지름길이 없을까 기웃대다가 번번이 나만 파김치가 된다.
딸 내외가 왔다. 한 달 만이다. 제 아이를 맡긴 것이 죄스러웠던지 들어오면서부터 미안하다 감사하다고 조아린다. 얼마 전부터 낯가림을 시작한 아이는 어미에게는 벙글벙글 이고 아비에게는 울음을 터뜨린다. 매일 스마트폰으로 어미와 만나는 것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세상에 거저 얻어지는 것은 없지. 나는 어깨를 힘껏 젖히고 아이를 넘겨준다.
밥을 안치던 참이다. 에미가 젖은 기저귀를 들이민다.
“이게 뭐예요?‘
오줌 싼 기저귀도 고 녀석의 얼굴을 보는 듯해서 반갑다. 쌀 바가지를 싱크대에 올리고 기저귀를 받아 들여다본다. 투명한 점액질 같은 게 조금 묻었다. 언제부터 그랬냐고 묻는 말이 사뭇 힐난조다. 그런 적 없었다는 내 말은 힘을 잃는다. 딸아이는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쓰레기통에 기저귀를 집어넣고 방으로 들어간다. 나머지 쌀을 밥솥에 붓고 물을 가늠하는데 방에서 다시 나온 딸이 병원에 가 봐야 할지 모른다며 쓰레기통을 뒤진다.
언짢다. 병원에 가는 것만으로 되겠느냐고, 이참에 의사와 함께 살아야 하지 않겠느냐는 말이 목까지 차오르는 것을 삼킨다. 달도 채우지 못하고 세상 밖으로 나온 어린것을 떼어놓고 편치 않았을 것이다. 다른 엄마처럼 많이 안아주지 못하고 예쁜 짓 하는 사진도 찍어주지 못한다. 무엇보다 제 아이에게 일어난 일을 먼저 알지 못하는 어미의 마음이 다른 입장까지 생길 여유가 있겠는가. 비져나온 가시를 간신히 추스른다.
아이가 태어나기 전부터 나와 남편은 독감과 폐렴 예방 접종까지 했다. 그렇게 아기를 기다렸다. 그제는 남편의 재채기 몇 번에 하루도 견뎌보지 않고 바로 병원으로 달려갔다. 3차 예방접종이 이달에 몰려 있는 손녀에게 혹시 감기라도 옮겼을까 걱정되어 지레 온 식구가 출동한 것을 보고 진료를 마친 의사가 거들었다.
“그렇게 처음부터 아이를 맡으면 안 된다니까요.”
그래도 세상에서 제일 예쁘다며 누가 빼앗아 가기라도 할까 낚아채듯 아이를 들쳐 업는다.
2개월 만에 폐렴을 앓아 입원했던 아이다. 밤새 줄기침으로 토하고 숨 가빠 자지러지던 어린것을 안고 애간장 녹이면서도 다 내 잘못 같아 더 아팠다. 장독대에 정화수 떠놓고 빌던 그 옛날의 할미처럼 알고 지은 죄, 모르고 지은 죄 용서하시라고 빌고 빌었다. 아이를 더듬으며 할미 손이 약손이기를 얼마나 염원했던가. 자다가도 몇 번이나 아이의 숨소리에 귀 기울인다. 기침 소리 한 번에도 소스라친다. 요즘은 가습기마저 불안하다 하여 방 여기저기 정화수 떠놓듯 물그릇 들여놓고 룽다를 달아 비손하듯 빨래건조대 들여 젖은 수건을 줄레줄레 건다.
외출에서 돌아올 때는 늘 뜀박질이다. 숨 쉴 새도 없이 계단을 두 칸씩 뛰어오른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아이의 웃는 얼굴에 온 집안이 환하다. 손 씻을 새도 없이 아이를 덥석 안아 올린다. 팔십 대 시어머니와 욕십 대 부부가 산다고 실버타운이라던 우리 집이 다시 맞은 봄이다. 우주가 뒤척이며 움 틔우는 기운에 가슴이 벅차다. 일찍 가시어 뵌 적 없는 내 외할머니를 아이에게서 읽는다. 너는 나다. 그리고 내 어머니의 어머니다. 인과 연이 만나서 사랑으로 열매 맺은 생멸의 순환이다.
파일럿 모자의 안경 낀 펭귄이 하늘을 날고 아이 소리가 퍼지는 우리 집은 지상에서 가장 생기 넘치는 집이다. 유아용 노래가 통통 튀어 오르면 나도 덩달아 튄다. 사람살이에 이보다 더 귀한 일이 있는가. 내가 꼬마 신 신고 문밖으로 나설 때까지 할미는 새장 속에 머물고 싶다. 이 봄날이 길어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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