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는 다시 목을 늘린다 / 마경덕
벚나무 그늘이 오르막까지 이어진 암병동. 707호 창 밖에서 봄이 기웃거렸다. 마른 나뭇가지는 봄볕에 살이 오르는데 여전히 외삼촌은 일어서지 못했다.
하얀 이마와 링거를 꽃은 앙상한 손이 유리벽을 건너온 봄볕에 젖고 있었다. 미동도 없는 저 손은 이쯤에서 지친 손을 놔 버리고 싶을 지도 모른다. 신음이 멈춘 병실은 물 속처럼 고요했다. 알 수 없는 쓸쓸한 기운이 건너왔다.
병실을 나서면 캄캄한 어둠에서 빠져나온 듯 눈이 부셨다. 문 하나를 사이에 둔 삶과 죽음의 경계란 얼마나 허술한 것인가. 병원 앞 노래방에선 쿵짝 쿵짝 트롯 메들리가 새어나오고 일층 갈빗집에선 불고기 냄새가 흘러나왔다. 삶과 죽음은 동전의 양면처럼 한 몸이었다.
그렇게 봄이 가고 삼촌도 뿌리 채 뽑혀졌다. 마지막 봄은 유난히 아름다웠다. 인물 좋기로 소문난 삼촌은 불에 태워져 한 줌 허공이 되었다. 그래도 남은 가족은 어떻게든 살아갈 것이다. 움푹 파인 구덩이도 곧 메워질 것이다. 슬픔도 점점 기운이 빠져 마를 것이다.
회기역에서 마을버스를 타고 집으로 오는 길, 지난 해 잘려나간 플라타너스가 길가에 사열하듯 서있다. 얼마 전 공사를 마친 ‘보호관찰소’ 앞 나무들은 모두 기둥으로 변했다.
참수를 당한 나무가 해마다 잎을 틔우는 건 뜨거운 여름이 있기 때문이다. 볕에 그을려 검푸른 나무는 오지게 잎을 매단다. 길을 가다가 넓적한 잎사귀에 철철 넘치게 볕을 담는 걸 보았다. 팔랑팔랑 제 발등에 푸른 그늘을 내려놓고 지친 발을 식히는 나무를 보았다. 그럴 때 플라타너스는 참 행복해 보인다. 발을 멈추고 거친 나무의 몸통을 쓰다듬으면 들뜬 나무의 마음이 손바닥으로 건너왔다.
플라타너스(양버즘나무)는 짧은 한 계절의 행복을 위해 긴 계절의 지루함을 견딘다. 그런데 ‘보호관찰소’ 앞 가로수는 그늘이 한창인 여름에 베어졌다. 그때 주차장을 늘리는 공사가 시작되었다. 혹독한 겨울을 버틴 나무의 목을 사람들은 서슴없이 쳐버렸다. 목이 없는 나무는 싸늘한 주검처럼 보였다.
툭툭 불거져 나온 옹이에 나무의 가시 돋힌 마음이 보인다. 4월이 다 가도록 저런 몰골로 서있을 것이다. 봄은 유독, 저 나무만 비껴간다. 아니 나무는 목을 잃고도 산다. 더 깊이 뿌리를 박고 버틴다. 봄은 상처를 쓰다듬어 기어이 나무를 일으킨다.
어느 해 봄, 목이 사라진 가엾은 사람을 기억한다. 소처럼 눈이 선한 청년은 거름으로 쓸 인분을 푸러 돌산에서 여수로 노를 저어 건너왔다. 하굣길에 물지게 지듯 똥통을 짊어진 그와 마주치면 얼른 눈길을 피하던 수줍음이 많은 청년, 괜스레 귓불이 붉어 지나갔다. 가가호호 들러 똥을 퍼서 뗀마(전마선)에 싣고 그는 돌산으로 건너갔다. 돌산대교가 생기기 전이라 나룻배로 오가던 시절이었다.
어느 날, 장군도 앞을 지나던 경비정에서 확성기 소리가 들렸다. 목 없는 시체 한 구를 건졌는데 신원을 알 수 없으니 와서 확인하라는 거였다. 호기심 많은 나는 시신이 있다는 집 앞 조선소로 구경을 갔다. 조선소 마당 구석에 목 없는 주검이 물에 퉁퉁 불어 맨 땅에 누워 있었다.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큰 물고기가 한 입에 덥석 물었든지, 스크루의 회전칼날에 목이 잘렸을 거라고 했다.
바다에 피를 다 쏟아버리고 피 한 방울 보이지 않는 그 시신, 영혼이 빠져버린 몸뚱어리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금세 소식을 듣고 죽은 남자의 부모가 달려왔다. 물에 빠져 죽은 남자는 눈이 맑은 그 청년이었다. 둘러 선 사람들이 해거름에 술을 먹고 노를 젓다 실족했을 거라고 수근거렸다.
나는 술이 그 청년을 죽였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를 죽인 건 끝도 보이지 않는 절망이다. 가방 대신 똥통을 지게 한 그 가난이 앳된 청년에게 술을 먹이고 바다로 등을 떠밀었다. 바다는 수없이 품었던 것을 내놓지만 그 큰 입으로 다시 삼키기도 한다.
어린 시절 여러 차례 죽음을 보았다. 나 역시 두 번이나 물에 빠져 죽을 고비도 넘겼다. 같이 수영하다 바다에 빠져 죽은 친구, 고기잡이 갔다가 풍랑에 목숨을 잃은 父子, 연애에 실패에 절벽 아래로 몸을 던진 꽃 같은 처녀…
바다는 헛디디면 깊은 수렁 같은 곳이다. 발 디딘 흔적이 없는 곳이다. 바다는 너무나 많은 것을 감추고 입을 다문다. 파도에 밀려 밀려 시신을 찾기도 어렵다. 잠수부가 시신을 찾아 물밑으로 가라앉고 시체를 인양하는 날은 밤새 당골네(무당)의 징소리가 먼 바다까지 울려 퍼졌다. 넋을 위로하는 진혼굿이 바닷가에서 벌어지면 동네가 한바탕 술렁거렸다.
서울로 식모살이 간 곰보 금순이, 여수 병모가지 사창가로 빠진 금자언니, 모두 바다의 젖을 빨며 자랐습니다. 개펄의 발자국이 크기도 전에 자매는 객지로 떠났습니다. 폐병쟁이 마누라 치다꺼리에 평생 바다를 파먹던 그의 아비는 제 몸 건사할 땅 한 평 없어 깊은 물 속에 누웠습니다. 눈빛 서늘한 원귀寃鬼가 되었습니다. 방파제에서 시끌벅적 진혼굿 벌어지고 소식 끊긴 딸년 대신 먼 친척 길동이 아지매만 제 설움에 웁니다. 신기神氣 오른 당골네의 징소리 산산이 찢어진 바다의 살점을 한땀 한땀 꿰매고 있습니다. 며칠 째 키를 넘던 파도를 잠재우고 바다 건너 마을로 챙챙 날아갑니다. 머구리배의 잠수부, 징소리 메고 다시 물 속으로 뛰어들 때 징헌 놈의 징울음 잔잔한 수면으로 지잉- 지잉- 미끄러집니다.
'수필세상 > 좋은수필 2' 카테고리의 다른 글
[좋은수필]콩심은데 콩나고 / 반숙자 (0) | 2013.04.01 |
---|---|
[좋은수필]단지한 처녀 / 이상 (0) | 2013.03.31 |
[좋은수필]우연의 행복 / 전희숙 (0) | 2013.03.30 |
[좋은수필]다시 보는 나의 꽃길 / 정호경 (0) | 2013.03.29 |
[좋은수필]돌아온 편작 / 전병덕 (0) | 2013.03.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