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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2

[좋은수필]우연의 행복 / 전희숙

우연의 행복 / 전희숙

 

 

 

대구사진비엔날레에 갔다. 그런데 첫날은 주최측끼리 개막행사를 치르느라 오후 네 시가 되어야 일반인 관람 입장이 가능하단다. 그렇다면 팜플렛에 시작 시간까지 적어놓는 것이 필수란 걸 왜 모르는 걸까. 아직도 시민을 배려하는 의식수준에 미치지 못하는 고리타분한 관료주의 넘치는 곳에 살고 있음을 뼈저리게 느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런 의례쯤은 상식이라도 된다는 듯 나 말고 멍청하게 기다리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혼자 하릴 없이, 보려고 한 전시회보다 더 꼼꼼히 기념품가게를 공부하고 있으려니 문득 세상에서 멀리 고립된 느낌이 들었다. 게다가 지나치게 자신감 넘치는 기념품점 여주인의 말투 또한 이상한 나라에서 크리켓 치는 여왕을 연상시켜 내가 마치 토끼굴에 빠진 엘리스라도 된 기분이었다.

여전히 시계침은 어디에 걸린 듯 제 자리만 맴도는 것 같았다. 같이 오기로 한 친구가 일이 생겼기 망정이지 틀린 정보로 미안한 일을 만들지 않은 것이 그나마 다행이라 여기며 제대로 된 의자 하나 없는 로비 화단턱에 걸터앉아 팜플렛의 글자란 글자는 모두 읽었다. 평소 들고 다니던 책조차 무거울까봐 망설이다 빼놓고 온 것이 후회막급이었다. 폰도 마음에 드는 작품을 찍기 위해 베터리를 아껴야 했으므로 나는 실로 오랜만에 난감하리만큼 심심함을 맛보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좋은 흥밋거리 하나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눈앞에 두 명의 멋진 여자가 한 아름씩 꽃다발을 안고 걸어 들어오더니 익숙한 몸짓으로 로비에 장식된 꽃을 갈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꽃꽂이는 두 사람 중 연륜이 더 있어 보이는 여자의 빠른 손놀림으로도 한 시간은 족히 걸리는 세심한 작업이었다. 나는 마치 바둑을 보듯 다음에 꽂힐 꽃의 위치를 점치며 홀린 채 그 신기한 손놀림을 지켜보았다. 할 일 없어 푹 쉬고 난 내 머리는 그녀의 작업을 한번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꽃꽂이의 원리를 원기왕성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꽃꽂이는 오래 전 친구 따라 배우려다 인내력의 한계로 쉽게 포기한 종목이다. 어떤 선생님들은 쉬운 것도 어렵게 꼬아서 아주 천천히 가르치는 재능이 뛰어나다는 생각만 들었었다. 아니 어쩌면 나의 마음이나 받아들일 능력 수준이 그 연대와 맞지 않았던 건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바로 눈앞에서 보는 그녀의 꽃꽂이 작업은 붓만 안 들었을 뿐 꽃으로 입체적인 그림을 그리는 것처럼 머릿속에 쏙쏙 들어왔다.

그 과정을 간단히 요약하면 먼저 가지나 잎으로 배경이 될 뒤를 두텁게 만들고, 큰 꽃으로 세로 중심선을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잡은 후, 중간 크기의 꽃으로 옆을 풍성하게 하여 주는데, 이때 센스 있게 액센트 하나 정도를 화려하게 살려준다. 이어 사방으로 뻗어나갈 뜻 한 꽃과 줄기 사이에 작은 꽃으로 틈틈이 음영을 넣어주는 것으로 끝맺음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수학공식을 풀 듯 명료하게 꽃을 꽂는 모습을 보며 순식간에 도를 깨친 듯 뿌듯했다.

역시 깨달음은 시간 가는 것도 잊을 만큼 즐거웠다. 구경에 몰두하다 네 시가 훨씬 지난 것을 깨닫고 부랴부랴 입장권을 사서 전시실로 향했다. 그러나 정작 고대하던 사진비엔날레는 지친 후 먹는 밥처럼 음미할 여력 없이 후다닥 보고 말았다. 그야말로 어디선가 읽은, 인생이나 여행의 참맛은 계획에 없는 우연에서 더 만나기 쉽다는 말이 실감났다. 집으로 발걸음을 옮기며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중 나는 속으로 웃으며 나에게 윙크했다.

“그래, 잠시 길을 잃거나 시간을 잃는 일은 새롭고 흥미로운 문 하나를 마주하는 것과 같은 일이야. 그러기에 삶의 양념처럼 감칠 맛 나는 실수는 가끔 하며 살아도 괜찮지 않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