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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2

[좋은수필]다시 보는 나의 꽃길 / 정호경

다시 보는 나의 꽃길 / 정호경

 

 

매일 신문에 실리는 ‘오늘의 운세’를 몇 년 동안 계속 봐 오다가 한동안 중단했다. 왜냐면 한 번도 제대로 맞는 날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혹시나 하고 불안한 마음에서 끊지 못하고 남모르게 봐온 것이 10년이 자났다.

그런데 요즘 나는 ‘운세’보다 ‘꿈’쪽을 더 신뢰하게 되었다. ‘오늘의 운세’는 나이가 같은 ‘띠’별로 묶어 한 보따리로 처리하는 패키지 투어 같은 것이지만, 꿈은 내 한 사람만을 위한, 내가 직접 목격한 하룻밤의 드라마이기 때문이다. 하기야 처음도 끝도 없는 한 토막의 환영(幻影)이기는 하지만….

 

그야 어떻든 간밤의 꿈이 맞아떨어진 저간의 에피소드를 먼저 여기 소개할까 한다.

아래는 틀니를 해 넣어서 밥을 먹을 때 김치 깍두기나 혹은 생선 대가리를 깨무는 데는 별로 지장이 없지만, 운전을 오랜 시간 하다 보면 목이 말라 옆에 둔 껌 통을 열어 한 알 입에 넣어 씹으면 그놈은 즉각 틀니를 물고 올라온다. 언젠가 승용차를 동승하고 가던 친구가 그런 애로를 말하기에 그럼 틀니를 빼놓고 씹으면 되지 않겠느냐고 말했더니 그 친구의 주먹이 순식간에 내 머리 위를 날았다.

그런데 또 세월이 흘러 윗니마저 탈이 나서 며칠 사이에 양쪽의 어금니가 아리기 시작했다. 그래서 두통, 치통, 생리통에 먹는 알약을 약방에서 사 먹었더니 조금 수그러지긴 했지만, 안전성을 확인하기 위해 혓바닥을 밀어 올려 시험해 봤더니 이제는 전후좌우로 자유롭게 흔들리고 있었다. 위의 양쪽 어금니가 모두 빠지고 나면 산토끼 모양의 앞니 두세 개로 식사를 해야 할 판이니 앞날이 난감했다. 그렇다면 위쪽에도 틀니를 해 넣으면 되지 않겠느냐고 주위에서는 쉽게들 말하지만, 돈이 있으면 무엇 때문에 그런 걱정을 하겠는가. 며칠을 두고 신경을 쓰다 보니 드디어 이가 홀랑 빠지는 꿈을 꾸고 말았다. 옛날 어른들은 이가 빠지는 꿈을 꾸면 집안에 흉사가 생긴다고 했는데 다행히도 그런 일은 없었지만, 아니나 다를까 예상했던 변고가 생기고 말았다. 저녁 밥상에 앉아 묵은 김치를 넣어 만든 돼지고기 찌개를 먹고 있는데 무엇인가 입안에서 뱅뱅 돌면서 입속의 볼을 간질이는 것이 있었다. 나는 돼지 껍질 토막으로만 알고 연신 매콤한 찌개의 맛을 즐기고 있었는데 그것이 아니었다. 아무래도 미심쩍어 뱉어 봤더니 한평생이 희로애락을 함께했던 어금니였다.

 

또한 바로 얼마 전의 일이다. 홍수를 만나 생사를 예측할 수 없는 흙탕물에 떠서 허우적거리며 헤엄을 치고 있다가 잠이 깬 간밤의 꿈은 속이 개운치 않았다. 그래서 긴장감을 늦추지 못한 채 종일 집안에서 꾸물대다가 저녁 무렵에야 모종의 월례회에 참석했다. 모임에는 으레 술잔이 돌게 마련이어서 자칫 친ᄀ 사이에 안 좋은 일이 생길까 봐 조심하는 가운데 간신히 모임을 마치고 헤어졌다.

모임을 마친 나는 언제나처럼 집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친구 한 사람을 내려주고 가는데, 날이 흐린 데다 차 속에 김이 서려 앞이 잘 보이지 않아 우리를 닦는 그 잠깐 사이에 간밤의 흉몽이 바로 적중해버렸다. 중앙선을 넘어 내 앞으로 달려오는 승용차를 발견하는 순간 나는 정신을 잃고 말았다. 내 차의 왼쪽 범퍼를 치고 튕겨 나가던 무법의 운전기사는 잠시 후에 나에게로 다가왔다. 내 차를 정면으로 들이받았으면 어떻게 됐을까 싶었다. 나는 한여름의 소나기를 맞은 초라한 수캐처럼 머리를 털고 정신을 가다듬었다.

“내가 밤눈이 좀 어두워서….”

사고의 운전가가 처음에는 이렇게 말하다가

“요즘 몸이 안 좋아서….”로 얼른 말을 바꾸어 횡설수설하고 있었다.

“밤눈이 어둡거나 몸이 안 좋으면 운전을 안 해야 할 것 아니오?”

내가 겁먹은 눈으로 목소리를 높였더니

“차를 고쳐 준다고 하는데 무슨 말이 그리 많아요?” 하며 대뜸 나를 덮어 누르려 했다. 어떤 일을 저질렀을 때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긴다고 한국 사회의 통념이 이 자리에서도 그대로 작용했다. 나와 동승하고 가던 친구는 그 사고 운전자와 잘 아는 사이라며 이 고장 시의원을 지낸 사람이라고 했다. 기고만장한 전직 시의원의 적반하장(賊反荷杖)에 나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다음 날 알아보니 이 고장에서 그의 몰염치와 무질서의 경력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이틀 뒤 그 무법자의 말대로 자동차 공업사를 거쳐 나온 내 차의 앞 범퍼는 그전보다 빛을 내고 있었지만, 내 심장의 범퍼는 움푹 오그라든 채 허탈감에 빠져 있었다. 하마터면 이승을 뜰 뻔했다는, 아슬아슬했던 체험담을 친구들에게 말했더니 당장 이런 반응이 돌아왔다.

“자네 지난번에 고향 산소를 단장한다더니 조상 덕 봤네!

 

매년 4월 청명 한식이면 고향의 부모님 산소에 가서 말 그대로 묘를 보살피는 성묘를 하고 오는데 올해의 4월 성묘는 예년과는 다른, 각별한 의미의 성묫길이었다.

나는 오늘 고향의 부모님 산소에 다녀왔다.

매년 이 무렵의 하동(河東)읍내에서 화개(花開) 쌍계사(雙溪寺)까지의 섬진강을 끼고 도는 굽이굽이 30리 내 고향의 벚꽃길이 오늘 따라 눈물 나게 아름다웠다.

나는 오늘 부모님 묘 앞에 꿇어 엎드려 이렇게 속삭였다.

“아버님, 어머님! 저를 이 세상에 며칠 더 머무를 수 있게 마음 써 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문학의 길에 들어서서 미처 이루지 못한, 좋은 수필 한 편 남기고 가는 것이 제 소원이었는데, 그걸 어떻게 알고 계셨네요.”

산소가 바로 길가에 있어서 오고가는 길손들 보기 좋으라고 몇 년 전 묘소 앞 축대에 개나리 가지를 한 아름 꺾어 심어 놨더니, 이제는 노란 꽃들이 한바탕 어우러져 햇볕 포근한 봄날의 시골길을 더욱 정겹게 만들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