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구꽃 / 강준오
조용한 휴일 아침, 맑은 봄 햇살에 왠지 기분이 상쾌하다. 마침내 따사로운 봄볕에 이끌리어 훌쩍 밖으로 나섰다. 그러나 딱히 갈 곳이 마땅치 않다. 야외로 연결된 전철이라도 탈까 생각했지만 목적지가 확연히 서지 않고 망설여졌다. 눈 밑의 코를 보지 않듯이 가까이 있으면서도 잘 가지지 않던 공원이 문득 떠올랐다. 공원은 집에서 쉽게 닿을 수 있는데다가 마침 철이 바뀌고는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곳이다. 국립중앙박물관과 연결되어있어 둘러볼 가치도 충분하다. 공원으로 가는 길목부터 순백의 목련꽃이 흐드러지게 피어있다. 마른 풀잎사이로 돋아난 여린 싹이 조팝꽃과 어우러져 봄 향기가 가득하다. 공원 구릉엔 살구꽃, 복사꽃, 연산홍이 꽃동산을 이뤄놓았다. 아직 지지 않은 매화꽃도 꽃들의 향연에 가세하고 있다. 작은 늪과 폭포가 있고, 시냇물이 흐르며 새들이 지저귀는 숲도 나타났다. 야외의 대자연도 좋지마는 도심의 아기자기하고 오롯한 이 공간도 봄을 한껏 느끼게 한다.
살구나무가 무리지어 있는 곳으로 발길을 옮겼다. 만발한 살구꽃이 꽃그늘을 만들고, 그 아래 누워 팔을 베고 잠든 연인들의 모습이 마냥 한가로워 보였다. 이따금 불어오는 봄바람에 꽃잎이 휘날리고 떨어지는 꽃잎은 잠든 연인들을 덮고 있다. 꽃잎이 행여 평온히 잠든 연인들을 깨우지나 않을까, 괜한 걱정을 하며 아름다운 정경에 시선이 머물고 있을 때, 산책을 나온듯한 노부부의 도란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남자분이 꽃이 핀 나무를 올려다보며 다정하게 설명을 하고 있었다. “벚꽃은 고목에 피어야 운치가 제격인데… 이정도의 나무에 핀 꽃은 좀…” 말하는 사람은 분명 살구꽃을 벚꽃으로 알고 말하는 것 같다. 하기야 비슷비슷한 생김새에 그만그만한 꽃들을 어찌 다 구별하며 살랴!
곳곳에서 꽃을 따라온 사람들이 부지런히 봄의 정취를 카메라에 담는다. 아마추어 사진작가처럼 보이는 몇 몇은 각자 카메라를 메고 있었다. 세심하게 방향과 각도를 잡으며 찍어대는 그들에게 관심이 갔다. 카메라가 귀한 시절의 구차했던 내 젊은 날을 떠올리며, 그들의 넉넉하고 여유로운 모습에 눈길이 쏠렸다. 그런데 한 젊은이의 말에 짐짓 놀랐다. “오늘은 벚꽃을 신물나게 찍었으니 이제 여의도 윤중로의 벚꽃은 찍지 않아도 되겠다. 윤중로는 사람들이 붐벼서 제대로 찍을 수도 없고….” 이들도 분명 살구꽃을 벚꽃으로 잘못알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꽃은 말하지 않는다. 화사한 자태로 사람과 벌 나비의 관심을 이끌 뿐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여러 사람들이 살구꽃을 벚꽃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 안타깝다. 하지만 사물을 식별하는데 인식의 오류는 어디에나 있을 수 있을 것이다. 일상생활에서도 잘못알고 착각하는 경우가 종종 있지 않은가. 눈에 보이는 것마저 모두가 진실은 아님을 발견하기도 한다. 우리의 뇌는 다양하게 입력되는 시각정보를 인식할 때, 먼저 과거의 경험을 이끌어낸다고 한다. 경험에서 얻은 기억된 정보를 연상하여 새로 입력된 시상과 종합 판단을 내리는데, 아마 노부부와 젊은이의 뇌리에는 살구꽃에 대한 기억정보가 없었거나 미약했던 모양이다. 경험상으로 흔하디흔하게 벚꽃을 보아온 터에, 그만그만한 나무에 그만그만한 꽃이었으니 어련히 벚꽃이리라는 판단을 내렸을 것이고 그렇게 여겼지 싶다. 아마 그들에게는 살구꽃을 눈여겨 보아오지 않았을 것이다.
봄에 피는 꽃은 대부분 잎이 나오기 전에 나목(裸木)에서 핀다. 나목은 생김새 등을 자세히 살피지 않고는 무슨 나무인지 분별하기 쉽지 않다. 또한 꽃의 모양과 색상, 크기가 판이하다면 얼른 식별할 수 있겠지만 비슷비슷한 꽃은 사실 분간하기 어렵다. 꽃의 구분이 뭐 그리 중요하냐고 말할 수 있다. 화창한 봄날의 흥취를 돋우는데 벚꽃이면 어떻고 살구꽃이면 어떠냐고. 영수를 철수라 부른들 큰 탈이 생길 리 만무하다. 그저 활짝 핀 꽃 속에서 아름다움을 만끽하면 그만일 수도 있다. 그러나 작은 것이라도 잘못된 인식은 여러 사람을 혼란에 빠트린다. 살구꽃을 찍어서 벚꽃이라고 인터넷 등에 버젓이 올린다면 심각한 문제가 야기될 수 있다. 우리가 지어준 사물의 이름을 정확히 알고 바르게 말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나목에 핀 꽃들을 보며 세심한 분별의 필요성을 생각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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