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아 딸아 / 유병석
우리 식구는 어느 주말 별러서 시내 외출을 한다. 신장 개업한 M 백화점. 여기는 아동복부 우리의 목적은 아이쇼핑이다. 적당한 조명과 쾌적한 실내 온도 속에서 물결처럼 서서히 흘러가는 그런 눈요기 쇼핑 말이다. 얼마를 가다가 2학년짜리 딸애가 일행에서 처졌음을 안다.
저만큼 혼자서 손가락을 물고 서 있다. 빨강 베리모와 레이스 달린 하얀 잠옷을 바라보고 서 있다.
점심으로 로스구이를 먹자던 4학년 오빠가 뛰어가며 빨리 오라고 끌어당긴다. 아이스크림이나 사 달라던 연약한 딸애는 몸을 흔들어 빼치며 오빠의 강제를 거부한다. 오직 냉면 한 그릇이면 된다던 아내가 어서 오라고 딸애에게 눈짓한다. 맥주가 먹고 싶었던 나는 서서히 딸애 쪽으로 걸어간다.
“이 기집앤 맨날 옷만 보면…… 돈이 어딨니?” 오빠의 구박이다. 어느 결에 점원 아가씨는 베레모를 딸애의 머리에 얹고 나서 레이스 달린 잠옷을 꺼내는 중이다. 아내의 눈총을 뒤통수에 따갑게 느끼며 나는 지갑을 꺼낸다. “아빠, 괜찮아. 집에 있는 걸 뭐.” 오빠와 엄마의 압력에 눌린 딸애의 말이지만 그건 건성이다. 딸애의 눈이 간 곳, 입에 물린 손가락은 그대로다.
포장한 꾸러미를 받아들고 돌아설 때 베레모 쓴 딸애는 상기된 얼굴로 나에게 바짝 달라붙고, 햄버거를 사 달라던 유치원짜리 사내놈은 “씨이, 난 야구 글러브 안 사주구우…….” 하며 뾰로통하고 “아버지 생각대로 하세요. 자전거 청구한 지 얼마나 됐죠? 기억이나 해두세요.” 이건 큰놈이다. 언제나처럼 나와 딸애가 한편 두 아들과 아내가 한편이 되어 양대 진영으로 갈려 냉전 체제에 돌입하는 즐거운 장면이다.
그러나 이건 모두 내 환상 속의 장면, 현실적으로 나는 아들만 내리 셋을 가진 촌스럽고 우악스럽고 산문적인 전생의 무슨 업보 때문일까. 예쁘고 귀여운 딸을 낳아 리본 달아 백화점에 데리고 다니고 싶었던 총각 때부터의 오랜 꿈을 하늘은 나에게 실현시켜주지 않았다. 딸을 갖기 염원한 지 10년하고도 수년, 기도하며 기대하기 열 달 세 번, 이제는 체념한 지 또 오래다. 예닐곱 살짜리 귀여운 여자애를 데리고 가는 사람을 길에서 만나면 나는 내 딸을 훔쳐간 것이 아닌가 싶어 지나친 뒤에까지 돌아보아야 하며 가끔 아무도 몰래 백화점 아동복부에 들어가(알다시피 아동복부의 예쁜 옷은 모두 여아용이다) 눈으로 쇼핑하며 배고픔을 채운다. 그런 날일수록 집에 오면 허세를 부린다.
“아이 셋을 갖는 게 이상적인데 우린 거기에 들었다. 2남 1녀가 A학점이라면, B학점은 1남 2녀가 아니라 나 같은 3남 무녀가 아닐까? 최저의 학점은 무남 3녀이고…….” 어쩌고 하면서 스스로 행운을 차지한 체 떠들며 아들놈 셋을 불러놓고 ‘사나이’ 를 강조한다. 이처럼 딸 갖고 싶은 소망을 나는 혼자서 간직해야 하는 귀중한 비밀로 깊이 숨겨두는데 역시 부부란 이신동심인가. 아내는 막내놈에게 여아복을 입혀 보이기도 하며 딸 없어서 외롭고 서러울 것은 내가 아니라 노후의 자기라는 역습을 감행하기도 하여 나는 아예 입도 못 열게 선수를 친다. 누가 뭐라고 하는 일 없건만 친손, 외손 도합 일곱 중 손녀가 단 하나도 없는 10할 안타의 시부모 및 가계에 책임을 돌리려 애쓰기도 하는 아내가 딴은 측은하지 않은 바도 아니다. 아들 셋을 좌우에 거느리고 나서면 온통 골목이 뿌듯한 것 같아 세상 두려울 것이 없다는 아내의 말도 거짓말이다. 제일 큰놈이 2학년이고 막내가 이제 겨우 걸음마 타기 면한 놈이니 그까짓 것들이 골목을 뿌듯하게 채울 리가 만무하니, ‘신포도’ 의 보상 심리이겠지.
우연이겠지만 나는 여학교 아니면 여학생이 반 이상 차지하는 강의실에만 들어간다. 출석 부르기를 즐긴다. 출석을 불러가다가 가끔 한 가닥 전류가 잠깐 가슴을 찌르르 울리고 지나가는 남모르는 쾌감을 만끽하기 위해서다. 달콤한 슬픔을 잠깐 일깨워주는 옛 애인의 이름이 거기에 있으며, 무엇보다 내가 지은 내 딸아이의 이름이 거기에 있다. 이 세상 끝날 때까지 영원히 실물로 현현하지 못하고 그냥 허공 중에 이름만 있고 말 그런 내 딸아이의 이름이.
몇 개의 어휘에 있어서 나는 단연 서구 편향적이다. 그 중 하나가 daughter-in-law다. 이 말의 중심은 daughter에 있다. 며느리도 딸이다. 나도 딸은 포기했다만 daughter는 눈 앞에 있다. 딸만이 딸이 아니라 며느리도 딸이다. 딸이면 다 딸이냐. 며느리가 진짜 딸이지-이런 억지라도 부려볼 뱃심이다. 아닌 게 아니라 귀엽고 참하고 청신하고 똑똑하고 순박한 아가씨들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나니 그들 모두가 내 딸이 될 가능성이 아주 짙기 때문이요, 다 내 딸처럼 보이는 까닭이다. 천하없어도 내 딸은 내가 고를 작정이다. 훗날 이들놈이 어쩌고저쩌고 하지 못하게 여기서 천하에 선언하는 바이다. 내 아들놈을 사람답게 만들자는 노력은 다시 말하면 훗날 좋은 딸을 얻기 위한 중간 작업일 수도 있다. 그러나 어쩌리오, 그 훗날이 20년 뒤의 웃날이니 말이다. 어느 선배에게 들은 이야기다. 다 큰 아들, 딸들을 데리고 해수욕장엘 갔것다. 남의 자식들처럼 발랄하고 예쁜 아가씨와 어울리지 못하고 다 큰 녀석들이 애비 곁에서만 빙빙 도는 게 보기 싫은 반면, 사내애들과 시시덕거리는 남의 여자애들같이 내 딸들이 저러면 어쩌나, 어느 사내애들이 내 딸을 끌어가면 어쩌나 하고 이율배반적인 걱정을 했노라고, 형안을 가진 그분인지라 나의 ‘딸 그리움증’ 을 해소해주기 위하여 위안의 말씀으로 들려주었으리라 생각하니 고맙기 그지없었다.
“자나 깨나 딸 조심, 자는 딸도 다시 보자.” 또 딸부자인 실없는 친구 하나가 이렇게 읊어댔것다. 나를 동정하는 그 친구의 충정도 내 모을 바 아니며 고마움 잊을 수 없다.
딸아 딸아!
내 남의 동정과 위안을 받고 있다. 난 동정과 위안을 싫어한다. 너희들만, 아니 너희들 중 하나만이라도 내 앞에 실물로 현현했더라면 무엇 때문에 내가 선배와 친구에게 위안과 동정의 노고를 강요했겠느냐 말이다.
아들은 산문, 딸은 시다.
딸아 딸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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