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등 / 고정희
미국 아틀란타에서 서울까지는 너무 멀어 한 번 갔다 오려면 큰 맘을 먹어야 한다. 우선 좁은 비행기 안에서 열 네댓 시간을 온 몸을 쪼그리고 앉아 있어야 하고, 도착해서도 멀미와 시차문제로 한 일주일은 정신을 차리지 못한다. 더구나 이번 여행에는 전보다 그 여독이 오래 갔다. 비행기 날개소리 요란한 곳에 자리를 잡은데다 앞자리에 앉은 어린아기가 자주 울어대어 잠을 한 숨도 못 잔 탓인 것 같다. 보다 못한 어머니께서는 사우나가 여독 푸는데는 최고라 시기에 함께 찜질방엘 갔다.
몇 년 사이에 어머니는 생각보다 훨씬 노인이 되어 있었다. 목욕탕 수도꼭지 앞으로 돌아앉은 어머니의 등은 한 줌 밖에 되질 않았다. 어린시절, 떼를 쓰고 울다가도 어머니의 '어부바'소리가 들리면 흐르던 눈물을 채 닦지도 않고 헤헤거리며 타오르던- 어머니가 무릎을 반 쯤 꺾으셔도 깨금발을 하고서야 어깨를 잡고 올랐던- 그 등은 내 시야를 온통 다 막고도 남아 돌 정도로 넓었었는데… 나와 동생과 손주까지 그렇게 따뜻하게 업어주시던 등이 그 사이 이토록 왜소한 모습으로 변한 줄을 미처 몰랐었다. 어머니는 내가 못 뵌 몇 년 동안에 목욕탕 바닥에 미끄러질까 두려워 모서리 쇠난간을 붙잡고 어기적거리며 발걸음을 옮기는 나약한 노인이 되어 있었다. 늘 씩씩하기만 하신 분이시라 그 모습대로 우리 곁에 계실 거라 생각하며 많은 일들을 차일피일 미룬 것이 큰 실수였다.
어머니의 등은 내가 어머니의 따스한 사랑을 느끼고 그 사랑을 배운 곳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머니는 내가 어떤 이유든 심하게 울 때면 늘 등으로 끌어당겨 업어주셨다. 그리곤 엉덩이를 토닥거려주시며 울음이 그치기를 기다려 주셨다. 울음이 길어질 때는 나를 업고 주변을 왔다 갔다 하시며 즉석에서 자작곡한 나만을 위한 노래를 지어 조용히 불러주시곤 했다.
"우리딸 착한 따~알, 우리 희야, 이쁜 희야…"
늘 칭찬 일색의 노래를 부르며 달래주시는 어머니의 노래는 어린 내가 들어도 실제 나의 행동과는 동떨어진 낯간지러운 아부성 가사 일색이었다.
하지만 희안하게도 그 노래를 듣고 있노라면 내속에서 불같이 일어났던 성정은 스르르 가라앉아 버리고 어느새 그 가사의 주인공처럼 그렇게 다소곳한 아이로 변해버리게 되었다. 그리고는 나 스스로 그런 착한 아이인 것을 어머니에게 보여주고 싶어서 마른 눈물자국을 문지르며 어머니의 등을 슬그머니 빠져나오곤 했다. 어머니의 어부바 속에서 들은 칭찬과 따뜻한 격려의 노래가사는 어머닌 어떤 행위를 해도 변함없는 사랑을 주신다는 확신으로 인한 정서적인 안정감과 자신감을 주었고 그분에게 사랑받는 자식이 되기 위해서 어디서든 자신의 존재를 함부로 여기지 않고 올바르게 살려는 인성을 키워주는데 지대한 역할을 했다.
어머니에게 업혔던 기억 중에서도 외갓집을 갈 때의 기억은 한 폭의 풍경화처럼 아직도 내 마음에 선명히 남아있다. 어린 내가 봐도 유난스러울 정도로 어머니가 가장 기분이 좋을 때는 외갓집을 가시던 때였던 것 같다. 어머니는 항상 외갓집을 가기 몇 주 전부터 짐을 꾸렸다 풀었다 부산을 떠셨고 내게도 평소보다 훨씬 관대하게 대하셨다. 그리고 잠자리에 누워서는 "몇 밤만 자면 외갓집 가지?" 를 퀴즈처럼 물으셨는데 나는 어머니를 기쁘게 해드리기 위해 손가락을 꼽으며 정답을 맞추려고 애썼던 기억이 난다.
당시 시골의 교통수단 이란 것이 하루에 한 번 왔다 갔다 하는 버스가 전부라 웬만한 길은 걸어서 다니던 시절이었는데 마침내 그날이 오면 어머니는 아침잠도 깨지 않은 나를 들쳐업고 20 리나 되는 외갓집을 향해 길을 떠나셨다. 부연 새벽길을 경쾌하게 걸으시는 어머니의 출렁대는 등에 파묻은 볼을 타고 따스한 체온이 온 몸에 나른하게 전해오는 그 행복감과 안락함이란!
나는 아직도 그때를 생각하면 어머니의 사랑으로 데워진 따뜻한 체온이 내 온몸을 감싸도는 것 같은 착각에 사로잡힌다. 햇살이 따뜻해지면 어머니는 나를 내려 세우고 손을 잡고 걸었는데 그 때 들려주시던 많은 옛날 얘기는 상상의 나래 속을 들락거리게 했다. 그 덕에 나는 어릴 적부터 이야기책 읽기를 좋아했고 그런 습관은 지금도 내가 책을 가까이 하는 바탕이 되었던 것 같다.
어린 나이에 걸을 때마다 먼지가 폴폴 날리는 비포장 도로를 20 리나 걸어야 하는 외할머니댁은 사실 무리일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의 이야기도 효과가 없을 정도로 지칠 때면 나는 길 한가운데 꼼짝않고 서서 어부바를 요구하곤 했었다. 그러면 어머니는 나를 등에 업고 손목마를 태워 주셨다. 두 손을 업혀있는 내 엉덩이 밑으로 깍지끼시고 "으이샤! 으이샤!" 하시며 올렸다 내렸다 손목마를 태울 때면, 나는 그 현란한 황홀감에 온 몸을 흔들어대며 즐거워했었다. 어머니의 손목마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놀이였다.
그런 어머니의 어부바가 새로 생긴 동생차지가 되어버린 후 나는 얼마나 서럽고 외로웠는지 모른다. 동생에게 옮겨간 그 사랑을 돌려놓기 위해 나는 어이없는 일을 구실삼아 떼를 쓰고 울음보를 터뜨려서 어머니를 참 많이도 당황하게 만들었다. 어머니는 울음을 그치게 하기 위해 내가 좋아하는 밥솥에 찐 고구마나 럭비공같이 생긴 백옥같은 박하사탕으로 나를 유혹하는데 성공하기도 했지만 그런 속물적인(?) 유혹으로 내 속마음을 왜곡하는 무심함은 나를 더욱 서럽고 외롭게 만들었다. 어머니가 내게 베푸는 최상의 사랑의 표현은 '어부바'라고 생각한 나로서는 그 등이야말로 누구에게도 빼앗기고 싶지않은, 기필코 사수해야할 고지였던 것이다.
돌이켜 보니 우리 5 남매를 지금의 자리에 오기까지 키우시느라 어머니의 등이 굽어 보잘것 없어질 동안 나는 어머니를 위해 별로 해 드린 게 없다. 학창시절에는 학교 다닌다고 바빠 어머니를 도와드리지 못하고 졸업 후엔 직장을 다닌다고 분주한 척 하며 도리어 유세를 떨었던 것 같다. 시집간 후엔 어머니가 한사코 말리던 미국으로 이민을 왔다. 그리곤 힘든 이민생활로 내 참을성에 한계가 올 때나 어머니의 생신 명절 때나 고작 전화를 하며 안부를 대신했다. 줄거울 때 보다는 힘들 때 더 보고 싶고 생각나는 분이셨다.
그 분은 나의 이런 이기적인 사랑에도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늘 당신보다 나를 먼저 챙기시기 위해 존재하시는 분이셨다. 투정만 부리는 내가 미울 법도 한데 그 분은 내가 가끔 "옛날에 내가 속 많이 썩였지?" 라고 물으면 "니가 있어 힘든 때를 참아냈다."시며 중매로 만나 결혼하자말자 학업을 계속하기위해 몇 년을 떨어져 산 아버지보다 첫아이인 내가 '첫사랑'이라 말씀하시기에 주저함이 없으신다. 그런 나의 어머니의 자그마해진 등을 본 순간 이국만리 먼 땅에 사는 내 처지가 참으로 싫고 후회스러웠다. 세월이 나를 기다려주지 않는 것도 생각 못하고 나중에 잘살면 손 잡고 함께 먼 여행도 떠나리라 마음먹었었다.
그리고 이제 사는 형편이 숨 돌릴 정도가 되었는데 어머닌 불편한 다리로 먼 여행은 엄두도 못 내시니… 어렵고 힘들더라도 지금 주어진 시간에 최선을 다하며 사는 것이 후회하지 않은 길이라는 것을 새삼 절감한다.
어머니는 불혹을 넘긴 내가 아직도 어린 딸로 보이시는지 나를 돌려 앉혀놓고 등을 밀어주시며 "안 아프냐?" 고 쉴새없이 물으셨다. 구부정한 등을 더욱 굽히시고 열심히 내 등을 밀어주시는 어머니의 손에서는 예전처럼 매서운 힘은 없었지만 변함없는 그 사랑이 가슴까지 저며 왔다. 남편과 아이들을 챙기느라 자투리 과일이나 식은밥이 늘 내 차지인 딸을 아직도 소중한 어린 딸로 생각하시는 어머니의 벅찬 사랑이 가슴까지 저며 와 자꾸 눈물이 나서 나는 어머니가 보실까봐 얼른 바가지에 물을 퍼서 머리에다 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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