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위섬 / 김광영
상처한 남자의 뒷모습이다. 촛농처럼 녹아내려 굳은 형상이 레테의 강을 건너간 애처를 그리면서 쌓아올린 한으로 보인다. 추억을 반추하는 어깨 너머로 애틋한 사연들이 넘실댄다. 절여진 몸에 따개비를 붙이고 끼룩대는 물새들의 얘기를 듣는 것이 유일한 낙인 그는 한과 그리움의 표상이다.
그의 동반자가 되려면 잠자리의 수정체를 닮은 눈과, 진돗개의 청각을 닮은 귀를 가져야 한다. 떨어지는 꽃잎을 함부로 밟지 못하고, 말 못하는 짐승의 부러진 다리를 싸매 줄 수 있는 마음이라야 옆에 다가설 수 있다. 구름 한 덩이, 풀 한 포기에도 존재의 의미를 부여하며, 보이지 않는 것에도 안테나를 세워 영혼을 접목시키는 치열함이 있어야 그에게로 가는 길이 보인다. 눈의 뜰채에 걸린 피라미 한 마리도 마음의 양어장에선 애지중지 길러야 바위섬의 가족이 될 수 있다.
그를 따르는 것은 암벽을 타는 것만큼 힘겹다. 밤을 지새우며 열병을 앓아본 사람이라야 사모할 자격이 있고, 상념의 수압이 높아져 수문을 열 때, 희열을 흐껴야지 후회가 된다면 그에게서 떠나야 한다. 그는 살아가는 모습을 진실로 아름답게 수채화처럼 그려내라고 한다. 남의 아픔에 같이 울고, 기쁨에 거짓 없이 웃는 순금 같은 자화상을 그려냈을 때 바위섬에게서 눈길을 받을 수 있다. 그의 마음에 안기면 올가미에 걸려 빠져나오질 못하고 마음의 창을 열고 주절대야 한다.
예민한 그는 눈과 귀가 열려있어 살아가는 풍경들의 잔해를 갈피에 끼워두면 훌훌 털어내라고 다그친다. 구근을 묻듯이 묻어버린 첫사랑의 얘기부터 아브라함이 약속받은 땅을 찾아 헤매듯 힘들게 살았던 얘기까지 주절대야한다. 멀리서 볼 땐 과묵하고 점잖게 보이지만 다가서면 자상해서 정이 새록새록 든다.
삶이 팍팍할 땐 바위섬도 카타르시스로 보여 고개를 돌리고 싶다. 해변에 서서 푸른 날 솟아오르던 감성을 모래바람에 날려 보내려면 어느새 봄꽃, 가을 낙엽 그리고 설경을 가슴에 안겨주며 떠나지 말라고 다독거려준다. 털어낸 수숫대 같은 모습으로 다가서도 우람한 풍채로 보듬어주어 숨겨두었던 집념을 불꽃처럼 일게 한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핑계를 대며 가풀막진 바위섬의 절벽에 발을 올려보면 마음만큼 쉽지 않다. 오지에서 만난 길잡이를 따르듯 내려준 밧줄을 잡고 매달려 보지만 영혼의 샘이 고갈되면 비척거려진다. 그럴 땐 이끼 긴 가슴을 씻고 심층수 같은 영혼의 물꼬를 대고 수위가 찰 때까지 마셔야 한다. 비바람엔 젖어보고, 햇빛좋은 날은 말리면서 서두르지 말고 유장하게 바위섬에 녹아들어야 한다.
그의 집은 대문이 넓어 쉽게 들어가지만 인정받기는 매우 힘들다. 주인의 안목이 높아 지성과 예성과 대중성을 고루 갖추어야 하고 무엇보다 깊은 심증을 원한다. 엄격한 심사 끝에 최종 합격자는 몇 명이고, 변방에 머무르는 상궁나인도 얼마뿐, 거의가 무수리 격이다. 힘든 관문일수록 가치 있는 길이므로 끈을 놓지 말라고 한다. 주름진 얼굴과 희끗한 은발이라도 상관없고 적막에 갇힐수록 영혼의 진액은 술술 잘 흘러내린다. 디지털의 기기가 난무할수록 아날로그적인 감성은 저녁연기 모락거리는 초가만큼이나 그리워 따뜻한 가슴팍으로 모여들 것이다. 싸늘한 두뇌들의 온돌방이 되어 품어주었을 때 방황하는 그들은 살맛나는 세상을 다시 만들어 갈 것이다.
그는 힘들고 배고픈 문학이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아닌 그 곳엔 고뇌의 집이 있다. 텃세가 센 그 집 안채엔 발을 들이기가 힘들어 문간방에라도 들어가려고 서성인다. 문간방 사람들은 솔직담백해서 야생의 떫은 맛이고 때로는 메주 띄우는 방안의 냄새 같이 삶의 향기가 진하게 풍겨 마을 잔치가 있는 날이면 눈치를 살핀다. 후덕한 혼주에겐 초대를 받지만 콩과 팥을 가리는 주인은 문간방 사람이라고 무시해 버리기 때문이다.
기린 같은 목으로 잔칫집 담장을 넘보며 언젠가는 고대광실의 안방을 꿈꾼다. 깡똥 맞지도, 늘어지지도 않는 자신이 인정받을 수 있는 길을 닦는다. 도토리묵이 잔칫상에 오르기까지의 고난처럼 문간방 사람들도 고뇌에 빠진다. 액체도 고체도 아닌 말랑한 묵으로 혀끝에 감겨들기 위해 떫은맛은 우려내고 찌꺼기는 걸러내 자신을 연마한 도토리묵. 그것을 닮은 수필일 때, 바위섬의 안채 섬돌 위엔 문간방 사람들의 신발도 가지런히 얹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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