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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2

[좋은수필]능소화 / 최민자

능소화 / 최민자

 

 

 

어릴 적 살던 집 뒤뜰에 능소화나무가 있었다. 담장을 뒤덮은 푸른 덤불 사이로 적황색 나팔모양의 꽃들이 여름 내도록 피고 지고했다. 소낙비가 한 줄기 훑어간 뒤에는 아직 싱싱한 꽃송이들이 담장 밑에 무더기로 흩어져 있기도 하였다. 누가 심술이 나 따 버린 것일까. 흙물이 튄 꽃송이들은 나무 위에서보다 더 환해 보였다. 그 집에서 산 게 네댓 살 때까지였으니 능소화는 어쩌면 내 평생 처음 본 꽃이었을지 모른다.

능소화는 여름에 어울리는 꽃이다. 여릿한 봄볕에 피어나기에는 꽃빛이 너무 호사스럽고, 싱그럽고 도타운 꽃부리가 이울어 가는 가을볕에도 어울리지 않는다. 등등한 폭염의 기세에 어느 것도 감히 대항할 엄두를 내지 못할 때에, 찬물에 세수하고 분단장한 여인처럼 상큼하게 피는 꽃이 능소화이다. 한여름 초록을 무참하게 제압하며 너울너울 번져가는 능소화 꽃 덤불은 차라리 도발적인 유혹에 가깝다.

화려하면서도 귀티가 나고 요염하면서도 천해보이지 않는 꽃. 능소화는 관능적이면서도 기품이 있는, 성숙한 여인 같은 꽃이다. 퇴락한 고택 돌담 위로 생긋하게 발돋움을 하거나 키 큰 고사목을 휘감고 소담스레 휘늘어진 모습이 먼 길 떠난 낭군을 기다리는 여염집 새댁 같기도 하고, 구중궁궐 달빛아래서 오지 않는 임을 그리다 지친 비빈의 넋 같기도 하다.

능소화는 언제나 담장 가를 서성인다. 십리 밖 발자국 소리에 귀를 세우고 서 있는 것일까. 눈 어두워 못 찾아들까 불 밝혀두려 하는 것일까. 온몸이 귀가 되고 온 몸이 등불이 되어 동네 고샅을 기웃기웃 내다본다. 에움길을 돌아서 처음으로 만나는 그저 그런 집이라 하여도 돌담 어디쯤에 능소화 한 자락만 척 걸쳐있으면 금세 집 전체가 환하게 밝아진다.

기다리는 일에 힘을 잃어서일까. 능소화는 저 혼자는 일어서지 못한다. 돌담이든 감나무든 휘감고 의지해야 몸을 추스르고 덩굴을 뻗는다. 덩굴져 자라는 여름꽃이 능소화만은 아니다. 등나무도 있고 나팔꽃도 있다. 등나무는 시원한 그늘을 이루지만 갈래갈래 무성하여 정갈한 맛이 없고 나팔꽃은 나약한 줄기에 속절없이 피고 져서 보는 이의 마음을 허망하게 한다. 꿈틀거리는 생명의 의지로 하늘을 넘보는 능소화는 오를 만큼 올라서고 나면 늘어진 가지 끝에 황홍빛 꽃송이들을 흐벅지게 피워달고 낭창거린다. 올라가 보았자 별 것이 없는 세상, 살아가는 일의 기쁨과 덧없음을 한 자락 풍류로나 풀어내고 싶은 것일까.

꽃들이 가지에 달려있는 모습도 재미있다. 무더기로 몰려 있는가 싶으면, 하나 둘 흩어져 있고, 왁자하게 흥청대는가 싶으면 다소곳하게 비울 줄도 안다. 맥이 끊긴 것 같다가도 어긋버긋 이어지는 낭자한 꽃 사태는 잦아지는 듯싶다가 돌연 휘몰아치는 한마당 풍물처럼 구성진 흥이 있다. 기세 좋게 치닫다 취한 듯 슬며시 자신을 놓아버리는 저 일탈의 여유는 어디서 배워 온 것일까. 늘어진 끄트머리를 살짝 치켜올려 꽃망울을 받쳐드는 매무시는 정지상태에 있던 무희의 버선발이 사뿐하게 허공을 차는 듯 어깃장스러운 교태마저 풍긴다.

삼복염천을 비웃듯 피고 지던 능소화도 때가 되면 돌연 모든 것을 접는다. 시들어 떨어질 때까지 추하게 매달려 목숨에 연연하는 법이 없다. 고조된 설움의 극한에서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자진해버리는 동백처럼, 기다림의 끈을 탁, 놓아버리고 어느 순간 툭, 고개를 꺾고 만다. 아름다움의 절정에서 제 서슬에 제 목을 꺾는, 눈부시도록 처연한 낙화. 능소화는 그렇게 슬픈 숨을 놓는다.

타협을 거부하는 비장한 절개는 그것으로도 끝나지 아니한다. 풀지 못하고 응어리진 그리움은 한이 되어 남는 법. 떨어진 꽃이라 하여 함부로 주워드는 일은 삼가는 것이 좋다. 꽃술에 맺힌 분가루가 한 맺힌 독이 되어 저를 탐하는 그대의 눈동자를 해코지할지도 모르는 까닭이다. 기다리던 임이 아니라면 죽어서도 제 몸에 손대는 것을 거부하는, 아름답고 도도하고 자존심 강한 꽃. 뜨겁고도 차가운 꽃의 단심(丹心)에 여름도 짐짓 뒷걸음을 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