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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2

[좋은수필]지나친 방어는 도전 / 박 헬레나

지나친 방어는 도전 / 박 헬레나

 

 

열대야의 연속이다. 끝이 보이지 않는 더위에 맞서 안간힘을 쓰고 있는 나를 조롱이나 하듯 배롱나무 꽃이 열을 토한다. 여름 백일을 꽉 채워 피는 저 꽃은 보기만 해도 뜨겁다.

어릴 적부터 시달려 온 아토피와 더위에 힘을 얻은 땀띠가 세력을 합쳐 붉은 그림을 그려놓은 내 몸은 흡사 게딱지다. 탁탁 쏘는 통증과 가려움을 가라앉히기 위해 하루 대여섯 번 샤워를 해야 하는 여름 한 철이 사계절 중 가장 견디기 어려운 액달이다.

피부과를 다녀왔다. 발진이 정도를 넘어 온몸에 번져 나갈 때는 병원 신세를 져야 한다. 아토피란 환경에 대한 과잉대응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라는 의외의 설명을 들었다. 약한 체력이 환경의 변화를 감당하지 못한 결과라고 알고 있던 나의 상식과는 정반대의 이야기다. 과잉이란 넘쳐난다는 의미이고 대응이란 맞선다는 뜻이 아닌가. 내 몸에도 누군가를 향해 반항할 힘이 있었다니 의외다. 봄바람에 부대끼고 폭염의 횡포에 시달리며 겨울 냉기에 바스락거리던 몸이다. 일교차가 심해지는 가을철에는 걸핏하면 두드러기가 돋아 온몸에 울긋불긋 오색 꽃을 피운다.

어느 찬 서리 내린 날 아침, 교복 아래로 드러난 내 종아리를 보고 “너 고등어 먹었나. 병원에 가 봐라”며 뒤따라오던 선생님이 걱정을 하셨다. 교정 화단 사이로 난 등굣길에서 나는 자주 선생님께 들켰다. 가려움으로 인한 고통보다는 다른 사람의 시선이 더 부담스럽던 나이였다. 부끄러워 모로 돌린 눈 앞에 진홍색 샐비어가 불을 뿜어냈다. 가을 아침에 냉기와 아토피, 빨간 샐비어 수치심, 그것들은 연결고리가 되어 하나를 건드리면 줄줄이 따라 일어난다. 이제 그립지도, 아프지도 않은 무딘 기억의 조각들이다.

자연의 흐름에 발맞추기에는 역부족이라 내 몸은 환경의 공격에 수없이 당하며 살아 왔다. 휘둘렸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그것이 과잉대응이라니 누가 공격자이고 누가 피해자인가. 의식의 향방을 거꾸로 뒤집어야 할 판이다. 아무리 부정하려 들어도 그 말은 선각자가 던진 화두처럼 가슴에 머물며 파문을 일으킨다. 곱씹어 보니 그 또한 타당한 이야기 같기도 하다.

관념의 틀을 깨면 새로움이 보인다. 사물에 과하게 대응한 것이 어디 몸뿐이겠는가. 긴장의 연속이었던 머리도, 주눅이 들어 쪼그라든 가슴도 외부를 향한 과잉대응의 결과였던 것은 아닐까. 소극적이고 친화력이 부족한 나의 성격은 낯가림이 심해 사람 사귀는 데도 오랜 시간이 걸린다. 상대방이 손을 내밀어야 가까스로 다가간다. 가까이 하고 싶은 어떤 대상도 그 쪽에서 다가오지 않으면 영원히 간격을 좁히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못난 마음을 탓하며 이 열등의식이 어디서부터 비롯되었는지 가끔 자가당착에 빠지기도 한다.

나의 위축된 자세가 지나친 방어에 기인했다면 과도한 방어는 저항이요 강한 저항은 곧 도전이라는 등식이 이루어진다. 역설적이게도 이 허약한 심신이 바깥을 향해 방패를 들이대기도 모자라서 전투적인 자세로 창을 겨누고 맞서고 있었다는 이야기다.

‘앓는 것은 죽는 연습’이라고 노래한 어느 시인의 시구처럼, 고통과 대면하는 것은 자신을 알아가는 공부다. 앞만 보고 내닫던 길 위에서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오던 길을 되돌아보는 여유다. 상투적인 인식의 범위를 벗어나 또 다른 시계(視界)를 만나는 길목이다.

그 길목에서 늘 함께해 오면서도 익숙한 얼굴에 가려 보이지 않던 것들을 만난다. 고정관념의 틀에 얽매여 일상에서는 건드려 보지도 못한 숨은 그림들을 찾아낸다. 그 ‘낯섬’ 앞에서 외길로 시선이 고정되어 있던 자신을 발견하고 사물을 대하는 생각의 방향을 바꾸어 보기도 한다. 저항으로 맞서기보다는 벽을 허물고 가슴을 열어 힘껏 세상을 보듬어가는 긍정적인 삶의 방식을 터득하기에 이른다.

아직도 더위는 기세를 꺾을 조짐이 보이지 않는다. 잔뜩 움츠리고 지나친 대응을 하고 있던 나의 아토피는 언제쯤 꼬리를 내리고 저항을 멈추려나. 의지의 통제를 벗어난 내 몸이 이글거리는 태양과 사생결단을 한다. 이제 사물에 대한 방어와 대응의 수위를 조절하여 자신을 다듬어 갈 일이 내 앞에 던져진 새로운 화두다.

‘인생은 대응하는 것이 아니고 적응하는 것.’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글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