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산 속에서 / 최 춘
멈췄던 폭우가 다시 쏟아졌다. 푹 내려쓴 우산 끝으로 지팡이와 발꿈치가 보였다. 우비 하나 없이 비를 맞고 가는 할머니 뒤에서 우산을 씌워주면서 물었다.
“어디까지 가세요?”
할머니가 어설픈 걸음을 멈추고 안전하게 서기까지는 약간의 흐름이 걸렸다. 눈을 맞추고 환하게 웃으며 대답하기까지도 역시 그랬다.
“조기 사는데 비가 멈추기에 걸으려고 나왔더니 또 쏟아지네요. 어디 살아요?”
“요 골목 살아요.”
“그럼 들어가세요”
“괜찮아요. 가시는 곳까지 모셔다 드릴게요.”
할머니는 허리를 다친 당뇨환자라고 했다. 학교 앞까지 가면 남편이 우산을 가지고 나와 있을 거라고 하면서 내 성의를 받아들였다. 그 분의 젖은 어깨를 맞대고 이런 저런 이야기 들으며 걸었다. 맞닿은 팔에서 온기를 느끼며 걸으면 걸을수록 우리 집에서 멀어지는 동안, 한쪽 어깨부터 발끝까지는 빗물이 흘러내렸지만 마음은 따뜻하고 보송보송했다.
그리 멀지 않은 학교 앞. 한참 만에 다다랐다.
“저기 우리 남편이 기다리고 있네. 중풍 맞았는데 이제는 많이 나았어요.”
비스듬히 서 있는 할아버지. 할머니의 남편은 건강한 분일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 분은 당신 혼자서 우산 쓰고 걷기에도 버거워보였다. 댁이 어디인지는 몰라도 대문 앞까지 가기로 생각했다.
할머니는 내 마음을 알기라도 한 것처럼 당신의 남편 우산 속으로 들어가지 않고, 남편에게 보고하듯 나를 만난 이야기만 했다. 그리고는 내 우산 속에서 내 허리를 더 꼭 감싸고 걸었다. 아주 오래 전부터 알고 지내는 가까운 사이처럼.
우리 집 골목에서 할머니가 말한 ‘조기’는 학교 앞에서도 삼십 분 쯤 더 걸어간 곳, 마당이 넓은 집이었다. 내 허리를 놓지 않고 안으로 들어가자고 했다. 할아버지도 그러자고 하셨다. 내가 할머니에게 우산을 씌워주었을 때 민망하지 않게 사양하지 않은 것처럼 나도 그 분의 뜻을 받아들였다.
마당에는 허브가 가득했다. 한쪽으로 온실처럼 꾸민 곳에는 난분이 즐비하고 기둥처럼 우뚝한 감나무와 모과나무가 지붕에 닿았다. 할머니가 마당을 한 바퀴 돌며 이름을 가르쳐 주고 잎을 따서 내 코 끝에 대주기도 했다.
“안에 들어가서 허브 차 마시고 가요.”
“아니에요. 이제 갈게요.”
“그러면 나물 뜯어가서 저녁에 해 먹어 봐요.”
할머니는 마당에서도 내 옷자락을 놓지 않았다. 가지 않겠다는 다짐까지 받고 안으로 들어가더니 소쿠리를 들고 나왔다. 몸이 불편한 어른이 허리를 구부리고 나물을 베는 것보다 내가 자르는 게 낫겠지만, 차마 그 분들이 가꾼 것을 내가 먹자고 직접 벨 수가 없어서 뜻에 따르기로 했다.
소쿠리를 들고 따라다니며 할머니가 나물을 베면 나는 소쿠리로 받았다. 젖은 민트 향기와 물방울 머금고 핀 한련화의 화려함에 후각과 시각이 모처럼 호사도 했다.
소쿠리에 나물이 수북했다. 할머니가 봉지에 꾹꾹 눌러 담았다. 나는 그것을 공손히 받아들고, 거실 창문으로 내다보는 할아버지의 잔잔한 미소를 보았다. 할머니가 지팡이를 짚고 대문까지 나와서 내 손을 만지고 또 만졌다.
삼남매는 모두 출가하고 남편과 둘이서 나무와 꽃을 가꾸며 살고 있으니까 언제든지 와서 나물 베어가라고, 약도 안 주고 순전히 거름으로만 가꾼 거니까 마음 놓고 먹어도 된다고 했다. 가을에는 모과와 감도 따 가라고 신신 당부를 하셨다.
언제 나는 내 어머니와 한 우산 속에서 허리를 감싸고 걸어 본 적 있는가. 우산 속에서 정답게 나물 베고 나물 받아 본 적 있는가. 우산 들고 마중하고 배웅한 적 있는가. 비 오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어머니를 그러 본다.
고향에 가면 백발이지만, 타향에서는 서른다섯 살 즈음의 모습만 떠오른다.
어린 시절. 우리 집에서는 누에를 쳤다. 그 일은 거의 어머니의 몫이었다. 어머니는 늘 바빴지만 추석이 다가오면 더 바빴다. 가을누에는 추석날을 걸쳐 마지막 잠을 잘 때도 있지만, 대개는 막 잠을 자려고 뽕잎을 가장 많이 먹을 때였다.
가을누에 칠 때는 태풍과 폭우도 잦았다. 아버지가 뽕나무 가지를 잘라 와서 잎의 물기만 닦고 가지째 잠박에 올려주는데도 어머니는 앞산자락에 있는 밭에서 뽕잎을 따 담은 자루를 이고 오셨다.
마루에 젖은 뽕잎이 수북수북했다. 마른 수건으로 잎 하나하나 물기를 닦아서 누에 밥을 주셨다. 그리고는 저녁을 지어 우리들 먹이고, 누에 밥 듬뿍 주고, 새벽에 또 누에 밥 주고…. 누에 밥 먹는 소리와 빗소리로 어머니는 더 분주하셨다.
그렇다. 비 맞고 일하는 어머니를 마중 나간 기억 없고, 우산 속에서 허리 감싸고 나란히 걸어본 기억도 없다. 양산으로 햇볕 가려 드린 기억은 더 더욱 없다.
고향에 가면 아버지가 그러신다. 젊은 사람들이 어머니를 차에 태워주고 우산도, 양산도 씌워주고 시장 본 물건도 현관문 앞까지 들어다준다고. 맘씨 좋은, 착한 사람들이라고. 그래서 텃밭에서 자란 채소와 감자, 고구마를 주고 객지에 사는 우리들을 생각하면서, 담 밖으로 늘어진 과일나무에서 감과 대추도 따 가랬다고 하신다. 마치 자녀들에게 효도 받고 나누어 준 듯 즐거워하신다.
내가 할머니에게 베푼 조그만 선의가 돌고 돌아 나의 부모님께로 돌아가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니 마음이 따뜻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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