젖어미 / 김애자
1. 불임의 땅
지난 여름에 서역을 다녀왔다. 동아시아와 유럽을 이어 주는 ‘실크 로드’에서의 여정은 몹시 힘들었다. 열사의 바람이 끊임없이 불어오는 대지에 기적처럼 세운 도시와 고대인들이 남기고 간 유적을 찾아, 비행기와 기차와 버스를 번갈아 타고 7박 8일을 집시처럼 떠돌았기 때문이다.
거기에서 처음으로 생명을 잉태하지 못하는 불임의 땅을 보았다. 불임의 땅은 눈물겹도록 쓸쓸했다. 우루무치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내려다본 광활한 평원은 건초처럼 메말라 있었고, 황사의 발원지인 황토고원과 흙산이 미라처럼 누워 있었다. 바람에 살이 깎여 나가고 태양이 습기를 삼켜 버린 그 곳은 대지를 ‘어머니’라고 부르는 문학적 은유마저 완강하게 거부하였다.
그래도 사람들은 열심히 살고 있었다. 우루무치와 쿠차, 유원, 하밀, 돈황, 투르판에 발을 붙이고 사는 사람은 천산에서 내려오는 젖줄에 매달려 도시를 세우고, 양을 치고 관개수로를 이용하여 목화와 포도와 하미과를 경작하면서 그런대로 역사와 문화와 전통을 이어 가고 있었다. 천산의 덕이었다. 천산이 머리에 이고 있는 만년설이 아니었다면 고비 사막에 둘러싸인 그 도시들도 타클라마칸 사막의 모래바람 속으로 사라진 ‘누란’과 같이 참담하게 몰락하고 말 것이었다.
‘누란’은 오아시스 도시였다. 타림 강이 로브노르 호수로 흘러드는 삼각주 위에 세워진 ‘누란’은 한때 서역에서 가장 경제와 문화가 번성했던 곳으로 알려졌다. 그런 고대의 한 도시를 지구상에서 흔적도 없이 지워 버린 것은 모래바람이었다. 수시로 불어오는 모래폭풍이 악마의 손길처럼 도시로 뻗치면서 강과 호수를 삼켰고, 역사와 문화와 전통을 유린했다. 사람들은 물을 찾아 ‘누란’을 버렸고 인적이 끊긴 도시는 깊은 모래 바닷속으로 함몰되고 말았다. “문명 앞에는 숲이 있고, 문명 뒤에는 사막이 남는다”고 한 샤트 브리망의 말이 옳았다.
나는 첫 기착지인 성도에서 시작하여 우루무치, 돈황, 유원, 하밀, 그리고 마지막 코스인 투르판까지 비행기와 기차와 버스로 이동하면서 그 모든 도시들이 언젠가는 ‘고창국’이나, ‘누란’처럼 전설만 남기고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만일 지구의 온난화 현상으로 천산의 만년설이 녹아 버리면 물 없는 땅에서 인간의 존립이 불가능함은 자명할 터였다. 지각변동이 일어났던 것도 아닌데 강물이 흘러간 흔적과 호수의 퇴적층이 곳곳에 널려 있었다. 메마른 벌판, 검은 뼈대만 앙상한 산, 황량함을 느끼게 하는 강의 퇴적층이 이처럼 불길한 예측을 가능케 했다. 게다가 해마다 누란을 함몰시킨 모래바람이 계속해서 영토를 확장해 나가고 있지 않는가. 그것을 막기 위해 중국은 ‘서부 대개척’이란 거대한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지만 돈을 쏟아 부어야 하는 모래바람과의 싸움은 그리 만만치 않을 것이다.
사실 내가 서역으로 떠나기 전부터 호기심을 가졌던 곳은 ‘사막의 미술관’으로 알려진 돈황석굴과 명사산이었다. 모래가 현악기처럼 맑은 공명을 낸다는 명사산 남쪽 사암(沙岩) 기슭에 있는 천여 개의 감실을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싶었다. 천년 동안 수많은 화공들과 역경사들과 조각가들이 만들어 놓은 감실 속의 불상과 벽화들이 사뭇 호기심을 부추기었다.
답사 매니아들을 따라 인천공항에서 성도로, 성도에서 우루무치를 거쳐 세 번째 당도한 돈황이란 도시는 공항 로비에서부터 그 분위기가 달랐다. 공후를 손에 든 보살상의 고요한 미소가 우리들의 피로를 보듬어 주었기 때문이었다. ‘사막의 미술관’ 어딘가에서 모방한 조형물일 것이란 지레짐작으로 허투루 넘기려 했으나 이내 끌려들고 말았다. 문화의 고졸함이란 땅과 공기에까지 밴 연후래야 지나가는 나그네의 발길을 잡을 수 있다는 사실에 새삼 감탄하며 호텔로 돌아와 여장을 풀었다.
2. 월아천
여행 네 번째 날 아침나절에, 일행은 명사산으로 향했다. 모래가 쌓여 이루어진 그 산은 바람이 불거나 사람이 산에 오르면 울고, 밟으면 부서진다는 말이 해조음처럼 가슴을 설레게 했었다. 그러나 엷은 황금빛이 감도는 8월의 명사산은 공명을 일으키지 않았다. 모래의 입자가 하도 고와 부서지기는커녕 실크자락처럼 발목을 잡고 자꾸만 뒤로 끌어내렸다. 낙타의 등에서 내려 대나무로 만든 사닥다리를 타고 올라가 내려다본 시계(視界)는 개벽한 태초의 모습이었다. 아니면 모래로 조형물들을 설치해 놓은 대단원의 전시장 같기도 했다. 새삼 풍백의 위력이 느껴졌다. 바람의 신이 아니고는 고운 입자로 삼각주가 분명한 피라미드와도 같은 산을 무슨 재주로 만들 수 있었겠는가. 음조의 높낮이처럼 이어지는 형상에 경탄을 바치고 나서 모래를 한 움큼 쥐어 보았다. 그리고는 어느 생물학자의 말을 생각했다. “우리가 무심히 떼어놓는 한 번의 발자국 밑에는 4만 마리나 되는 미생물이 있다”던 그의 말을.
하지만 내가 손으로 움켜쥔, 그 한줌의 모래 속에는 단 열 마리의 미생물도 살아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이슬조차도 내리지 않는 그 땅에는 물의 윤회도 없었다. 이슬의 전생과 구름의 전생과 비의 전생이 하나의 원융(圓融)이 란 것을, 그 원융에서 유기질과 무기질이 발생하는 고리의 순환을 거부한 채 오직 불볕과 모래바람의 폭정만 난무하는 고독한 땅이었다.
낙타는 달관자의 모습으로 멀리서 온 순례자를 등에 싣고 묵묵히 걸어가고 있었다. 낙타의 고삐를 잡은 소녀도 낙타처럼 걸으며 우리를 월아천(月芽泉)으로 인도하고 있었다. 낙타와 소녀는 오아시스로 가는 동안 내내 나를 우울하게 했다. 평생을 사막의 짐꾼으로 살아야 하는 낙타의 운명과, 불과 열대여섯 살쯤 되었을 소녀가 하루 종일 밑창이 얇은 운동화를 신고 뜨거운 모래펄을 걸으며 길라잡이를 한다는 것이 안쓰러워서였다. 낙타에게는 고삐를 풀어 주고, 소녀에게는 신록이 아름다운 한국의 5월을 보여 주고 싶었다. 그런 생각들로 흔들리는 낙타의 요람이 못내 가시방석이었다.
문화 순례자들은 마침내 낙타와 소녀를 따라 월아천에 도착했다. 거기에는 물이 있었다. 젖어미가 희뿌연 사막 한가운데에서 초승달 모양으로 앉아서 젖가슴을 열어 놓고 목마른 자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사람의 눈을 속이는 신기루가 아니었다. 물가에는 나무도 있었고 갈대와 온몸을 가시로 무장한 낙타풀도 연보라 꽃을 달고 있었다. 누각 마당에는 꽃밭도 있었고, 꽃밭에는 우리 집 정원처럼 백일홍, 분꽃, 과꽃, 족두리꽃도 다 있었다. 젖어미가 젖을 물려 기른 어여쁜 생명들이었다.
여인이 그 곳에 자리를 잡은 것이 언제부터였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어쩌면 사막과 함께 생겨서 지금까지 그렇게 초승달처럼 고운 자태로 사람들의 발길을 기다려 왔는지도 모른다.
다만 분명한 것은 중국의 비단이 그 길을 따라 멀리 로마나 인도로, 혹은 러시아 등지로 유출되었다는 점이다. 당시에 수많은 대상들과 승려들이 낙타를 끌고 여인의 젖가슴으로 파고들며 목을 축이고 여정에 지친 몸을 쉬어 갔다는 사실이다. 국적도 묻지 않고, 종족도 가리지 않고 찾아오는 목숨들을 품어 주던 젖어미는 8월의 모래바다 한가운데서도 흐트러짐 없이 의연했다.
나는 돌아와 물을 마실 적마다 그 어미를 생각했다. 희뿌연 모래바다에서 가슴을 열어 놓고 목마른 생명을 기다리는 관음의 젖가슴을 잊을 수가 없었다. 하여 내가 살아오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써버린 물과, 이 강산과 국토를 기름지게 하기 위해 살신(殺身)한 젖어미들에게, 그리고 공장의 폐수로, 또는 도축장으로 들어가 죽은 소들의 핏물을 씻어낸 관음에게 이 부족한 글을 바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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