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청객 / 정지극
후미진 곳에서 남들이 알까 두려워하며 끼리의 모임을 즐긴다. 웅성거림 속에 분위기가 무르익어가고 있다. 키득거림과 멈칫거리는 손길이 공기를 빨아들인다. 순간, 모든 것이 정지되어 버린다. 예견된 만남이었나?
현관문을 열었다. 형체도 없는 것이, 고추같이 매운 것이 닿으면 타들어 갈 것 같은 고통으로 전신을 엎쳐온다. 아귀 같은 검은 손길 사이로 빨간 불길이 춤을 추고 있다. 그들만의 잔치가 막 시작된 것이다. 흠칫 몸을 떨면서 몇 발짝 뒤로 물러난다. 손님을 맞는 거친 손길이 속내를 가늠케 한다.
대뜸 끌고 올라온 소방호스 끝의 관창을 잡고 노즐을 연다. 한시바삐 올라오고자 하는 물길들의 숨소리가 들린다. 분기탱천한 소방호스가 벌떡 일어선다. 고기와 사투를 벌이는 낚싯대의 팽팽한 떨림처럼 용솟음치듯 뻗쳐 나오는 이 전율! 이윽고 힘차게 뿜어져 나오는 하얀 물줄기. 긴장의 끝에 얻는 방사의 쾌감!
분수처럼 뻗치는 물줄기는 숨 쉴 틈을 주지 않고 이글거리는 불구덩이를 사정없이 후려친다. 못된 짓을 하는 놈들의 따귀를 때리듯. 한 대씩 얻어맞은 놈들은 흠칫 놀라는 기색인가 싶더니 이내 ‘푸푸푸’ 냉소하면서 사정없이 흰 연기를 뿜어낸다. 동네 주정뱅이 안간 망나니처럼 간간이 천정에 매달린 등이나 반자 위에 있는 물건들, 심지어는 옷가지 같은 것들까지 손에 잡히는 대로 내동댕이치면서 발버둥치고 있다.
“치지직, 쿠구우웅, 피비빅, 타닥, 탁, 쿵, 퍼벗!”
아무도 따라 할 수 없는 물과 불의 화음이 매캐함 속에서 메아리친다. 불청객에 대한 경고의 메시지이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희희낙락, 붉은 혓바닥을 날름거리면서 즐기던 저희들만의 유희에 훼방을 놓은 데 대한 심통인가? 열기와 연기가 아무리 심해도 어느 정도 앞은 보이던 것이 이제는 한 치의 앞도 가늠키 어렵다. 고열에 수증기가 보태어지니 온몸 구석구석이 푹푹 찐다.
지금 나를 보호해 주고 있는 것은 헬멧과 방수복, 방수화, 그리고 답답하기는 하나 그래도 20여분 정도 신선한 공기를 공급해 주는 공기호흡기뿐이다. 여기에 의지해서 소방호스로 물을 뿌려대고, 갈고리나 도끼로 현장을 제압하는 것이다. 아무도 보는 이 없어도 거기 불이 있기 때문에 물러설 수 없는 한판의 싸움이다. 골리앗을 대하는 다윗의 싸움이라고나 할까? 한 대 잘 못 맞으면 그대로 케이오펀치이다. 자칫 잘못해서 다리가 걸려 넘어지거나 옆의 벽이 무너지면 그대로 끝장이 나는 상황이다. 꽃상여를 타거나 화상이라는 흉터가 평생을 따라 다닌다.
고열 속에 온몸은 땀으로 범벅이 되고 숨은 턱에 닿았으나, 무엇보다도 가장 두려운 것은 사방에서 집적대는 고독이란 놈이다. 고독은 공포를 몰고 다니면서 명석함을 가리기도 하고, 때로는 패닉상태로 이끌기도 한다. 바로 옆의 동료가 있지만 나와 그는 다 똑 같은 입장이다. 여기에는 엊그제 갓 들어 온 김 소방사나, 20여년 방수복을 입은 박 반장이나 매 일반인 것이다. 언제 누구에게 닥칠지 모를 공포가 때로는 이들을 용맹스럽게 만든다.
멈추지 않고 퍼부어대는 집요한 공격에 놈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최후의 발악을 한다. 상대방이 등을 보일수록 더욱 신이 난 물줄기는 불타고 있는 것들을 차례차례 접수래 간다. 울면서 애원도 해보고, 괴성도 질러보지만 성난 소방호스의 기세는 꺾일 줄 모른다.
장롱 속 이부자리에서 희번덕거리며 고개를 내밀던 불꼬리가 혼비백산하여 사라지고, 처마 속에 숨어있던 불씨가 숨을 거둔다. 뻥 뚫린 천정과 사그라져버린 가재도구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접근을 거부하던 연회장은 할퀴고 찢겨진 앙상한 몰골을 드러낸다.
이윽고 포만감에 느긋해진 소방호스가 득의양양하게 무대를 떠안다. 볼썽사나운 현장, 어느 것 하나 건질 게 없는 쓰레기들. 열과 연기 속에서 고생 끝에 남은 것이 고작 이것이란 말인가. 차라리 훼방 놓지 말고 신나게 소진되도록 내버려 둘 것을…
건듯 불어온 바람의 끝자락에 허허로움이 남는다.
'수필세상 > 좋은수필 2' 카테고리의 다른 글
[좋은수필]정선 장날 / 우명식 (0) | 2013.07.17 |
---|---|
[좋은수필]하얀 소묘 / 서 숙 (0) | 2013.07.16 |
[좋은수필]벌레 / 송연희 (0) | 2013.07.14 |
[좋은수필]젖어미 / 김애자 (0) | 2013.07.13 |
[좋은수필]아버지의 계절 / 박모니카 (0) | 2013.07.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