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진기행 6 / 김승옥
우리는 우리가 찾아가는 집에 도착했다. 세월이 그 집과 그 집 사람들만은 피해서 지나갔던 모양이다. 주인들은 나를 옛날의 나로 대해주었고 그러자 나는 옛날의 내가 되었다. 나는 가지고 온 선물을 내놓았고 그 집 주인부부는 내가 들어 있던 방을 우리에게 제공해주었다. 나는 그 방에서 여자의 조바심을, 마치 칼을 들고 달려드는 사람으로부터, 누군가 자기의 손에서 칼을 빼앗아주지 않으면 상대편을 찌르고 말 듯한 절망을 느끼는 사람으로부터 칼을 빼앗듯이 그 여자의 조바심을 빼앗아주었다. 그 여자는 처녀는 아니었다. 우리는 다시 방문을 열고 물결이 다소 거센 바다를 내어다보며 오랫동안 말없이 누워 있었다.
"서울에 가고 싶어요. 단지 그거뿐예요."
한참 후에 여자가 말했다. 나는 손가락으로 여자의 볼 위에 의미없는 도화를 그리고 있었다.
"세상엔 착한 사람이 있을까?"
나는 방으로 불어오는 해풍 때문에 불이 꺼져버린 담배에 다시 불을 붙이며 말했다.
"절 나무라시는 거죠? 착하게 보아주려는 마음이 없으면 아무도착하지 않을 거예요."
나는 우리가 불교도(佛敎徒)라고 생각했다.
"선생님은 착한 분이세요?"
"인숙이가 믿어주는 한."
나는 다시 한번 우리가 불교도라고 생각했다. 여자는 누운 채 내게 조금 더 다가왔다.
"바닷가로 나가요 네? 노래 불러드릴께요."
여자가 말했다. 그러나 우리는 일어나지 않았다.
"바닷가로 나가요, 네? 방이 너무 더워요."
우리는 일어나서 밖으로 나왔다. 우리는 백사장을 걸어서 인가가 보이지 않는 바닷가의 바위 위에 앉았다. 파도가 거품을 숨겨가지고 와서 우리가 앉아 있는 바위 밑에 그것을 뿜어놓았다.
"선생님"
여자가 나를 불렀다. 나는 여자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자기 자신이 싫어지는 것을 경험하신 적이 있으세요?"
여자가 꾸민 명랑한 목소리로 물었다. 나는 기억을 헤쳐 보았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언젠가 나와 함께 자던 친구가 다음날 아침에 내가 코를 골면서 자더라는 것을 알려주었을 때였지. 그땐 정말이지 살맛이 나지 않았어."
나는 여자를 웃기기 위해서 그렇게 말했다. 그러나 여자는 웃지 않고 조용히 고개만 끄덕거렸다. 한참 후에 여자가 말했다.
"선생님, 저 서울에 가고 싶지 않아요."
나는 여자의 손을 달라고 하여 잡았다. 나는 그 손을 힘을 주어 쥐면서 말했다.
"우리 서로 거짓말은 하지 말기로 해."
"거짓말이 아니에요."
여자는 방긋 웃으면서 말했다.
"<어떤 개인 날> 불러드릴께요."
"그렇지만 오늘은 흐린 걸."
나는 <어떤 개인 날>의 그 이별을 생각하며 말했다. 흐린 날엔 사람들은 헤어지지 말기로 하자. 손을 내밀고 그 손을 잡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을 가까이 가까이 좀더 가까이 끌어당겨주기로 하자. 나는 그 여자에게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사랑한다>라는 그 국어(國語)의 어색함이 그렇게 말하고 싶은 나의 충동을 쫓아버렸다.
우리가 바닷가에서 읍내로 돌아온 것은 저녁의 어둠이 밀려 든 뒤였다. 읍내에 들어오기 조금 전에 우리는 방죽 위에서 키스를 했다.
"전 선생님께서 여기 계시는 일주일 동안만 멋있는 연애를 할 계획이니까 그렇게 알고 계세요."
헤어지면서 여자가 말했다.
"그렇지만 내 힘이 더 세니까 별수 없이 내게 끌려서 서울까지 가 게 될 걸." 내가 말했다.
집으로 돌아와서 나는 후배인 박이 낮에 다녀간 것을 알았다. 그는 내가 <무진에 계시는 동안 심심하시지 않을까 하여 읽으시라>고 책 세 권을 두고 갔다. 그가 저녁에 다시 오겠다고 하더라는 얘기를 이모가 내게 했다. 나는 피로를 핑계로 아무도 만나기 싫다는 뜻을 이모에게 알려두었다. 이모는 내가 바닷가에서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고 대답하겠다고 말했다. 나는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아무것도. 나는 이모에게 소주를 사오게 하여 취해서 잠이 들 때까지 마셨다. 새벽녘에 잠깐 잠이 깨었다. 나는 이유를 집어낼 수 없이 가슴이 두근거렸는데 그것은 불안이었다.
'인숙이'하고 나는 중얼거려보았다. 그리고 곧 다시 잠이 들어버렸다.
나는 이모가 나를 흔들어 깨워서 눈을 떴다. 늦은 아침이었다. 이모는 전보 한통을 내게 건네주었다. 엎드려 누운 채 나는 전보를 펴보았다. <27일 회의 참석 필요, 급 상경 바람 영> <27일>은 모레였고 <영>은 아내였다. 나는 아프도록 쑤시는 이마를 베개에 대었다. 나는 숨을 거칠게 쉬고 있었다. 나는 내 호흡을 진정시키려고 했다. 아내의 전보가 무진에 와서 내가 한 모든 행동과 사고(思考)를 내게 점점 명료하게 드러내 보여주었다. 모든 것이 선입관 때문이었다. 결국 아내의 전보는 그렇게 얘기하고 있었다. 나는 아니라고 고개를 저었다. 모든 것이, 흔히 여행자에게 주어지는 그 자유 때문이라고 아내의 전보는 말하고 있었다. 나는 아니라고 고개를 저었다. 모든 것이 세월에 의하여 내 마음속에서 잊혀질 수 있다고 전보는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상처가 남는다고, 나는 고개를 저었다. 오랫동안 우리는 다투었다. 그래서 전보와 나는 타협안을 만들었다. 한번만, 마지막으로 한번만 이 무진을, 안개를, 외롭게 미쳐가는 것을, 유행가를, 술집여자의 자살을, 배반을, 무책임을 긍정하기로 하자. 마지막으로 한번만이다. 꼭 한 번만, 그리고 나는 내게 주어진 한정된 책임 속에서만 살기로 약속한다. 전보여, 새끼손가락을 내밀어라. 나는 거기에 내 새끼손가락을 걸어서 약속한다. 우리는 약속했다.
그러나 나는 돌아서서 전보의 눈을 피하여 편지를 썼다. <갑자기 떠나게 되었습니다. 찾아가서 말로써 오늘 제가 먼저 가는 것을 알리고 싶었습니다만 대화란 항상 의외의 방향으로 나가버리기를 좋아하기 때문에 이렇게 글로써 알리는 것입니다. 간단히 쓰겠습니다. 사랑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제 자신이기 때문에, 적어도 제가 어렴풋이나마 사랑하고 있는 옛날의 저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옛날의 저를 오늘의 저로 끌어놓기 위하여 있는 힘을 다할 작정입니다. 저를 믿어주십시오.
그리고 서울에서 준비가 되는 대로 소식 드리면 당신은 무진을 떠나서 제게 와 주십시오. 우리는 아마 행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쓰고 나서 나는 그 편지를 읽어봤다. 또 한번 읽어봤다. 그리고 찢어버렸다.
덜컹거리며 달리는 버스 속에서 나는, 어디쯤에선가, 길가에 세워진 하얀 팻말을 보았다. 거기에는 선명한 검은 글씨로 <당신은 무진읍을 떠나고 있습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라고 씌어 있었다.
나는 심한 부끄러움을 느꼈다.
'수필세상 > 단편소설'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단편소설]마지막 수업(2) / 알퐁스 도테 (0) | 2013.08.17 |
---|---|
[단편소설]마지막 수업(1) / 알퐁스 도테 (0) | 2013.08.16 |
[좋은소설]무진기행 5 / 깁승옥 (0) | 2013.08.07 |
[좋은소설]무진기행 4 / 김승옥 (0) | 2013.08.06 |
[좋은소설]무진기행 3 / 김승옥 (0) | 2013.08.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