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여름철 매미소리와 낭만 / 정호경
나의 서재는 바다가 바라보이는 앞쪽이 아니라 산바람이 불어오는 뒷골방이다. 그래서 글 쓸 때 말고도 시원한 산바람을 쐬기 위해 서재에 자주 앉는다. 멍하게 산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유리창에 매미가 한 마리 날아와 붙더니 속 터지게 울어댄다. 시원한 숲을 앞에다 두고 하필이면 아파트 창틀인가.
요즘에는 등산객들도 많다. 주말이나 휴일에는 가족 동반 등산이 많지만 평일에는 주부들이 서너 명씩 짝을 지어 재잘거리며 산에 오른다. 이제는 시내보다 산이 더 시끄럽다. 그래서 매미들이 사람들의 소음을 피해 산에서 내려와 분노를 터뜨린다. 골이 울리도록 쉬지 않고 소리를 질러댄다. 그렇다고 그 녀석을 쫓아버릴 수도 없다. 내가 피하는 도리밖에 없다. 그래서 거실로 나와 베란다에 기대어 바다를 내려다보고 있는데 시끄럽기는 마찬가지다. 앞쪽 유리창에도 왕매미가 한 마리 붙어 소리를 질러댄다.
옛날의 매미 소리는 여름철의 낭만이었다. 하지만 요즘은 독서를 방해하는 소음공해다. 시끄러워서 못 견디겠다. 가뜩이나 머리가 굳어 막히기만 하는 글이 그놈들 때문에 좀체 풀리지 않는다.
나는 작년부터 서울로 올라가 명절 차례를 지내고 시골로 내려온다. 동생이나 자녀들이 모두 서울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이번 태풍을 서울에서 텔레비전 화면을 통해 겪었다. 이를 통해 이번의 태풍 이름이 ‘매미’라는 것을 알았다. 여름내 나의 신경을 자극하던 그놈이 바로 오늘의 이 매서운 태풍의 징조였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유리창에 붙어 소리 지르던 그 녀석들의 위력이 이렇게 대단한 줄은 미처 몰랐다. 제주도를 비롯한 남쪽 해안 일대를 강타하고 있는 장면은 스릴 있는 영화의 한 장면이 아니라 이것은 온몸이 죄어드는 공포의 현실이다. 산등성이의아파트가 송두리째 날아가 버릴 것 같은 위력이다. 작년의 태풍은 금년의 이것에 비교될 바는 아니지만, 불안한 마음을 참다못해 같은 동에 사는 친구에게 전화로 알아봤더니 무사하다는 답변이었다. 그러나 이는 나만의 문제인가. 서울의 하늘은 조용했지만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친척이나 이웃들에 대한 걱정 때문이었다.
남쪽 해안 일대의 도시나 섬들은 매년 겪는 일이다. 서울의 사람 홍수를 피해 한적한 이곳으로 찾아왔더니 웬 날벼락인가. 작년 이맘때의 태풍도 예사로운 것이 아니었다. 나와 아내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서울에서 이곳의 자연경관 구경하러 내려왔던 딸은 정말 별스런 풍경을 감상하고 돌아갔다.
두 번 다시 회상할 일은 아니지만, 너무나도 두렵고 충격적인 사건이었기에 작년의 공포를 돌이켜 본다. 태풍은 무서운 자연현상이란 것만 알고 있을 뿐, 과학에 무식한 나는 그에 대한 상식적인 지식이라도 가지고 있어야 할 것 같아서 참고 서적을 뒤져보았더니 이렇게 설명되어 있었다.
북태평양 남서부에서 발생하여 우리나라, 필리핀 중국 등지를 내습하는, 폭풍우를 수반한 맹렬한 열대 저기압
태풍에 대한 설명을 보면 그저 초등학생의 기말고사 대비용 지식밖에는 안 되어 보이는 시시한 요것이이토록 사람의 간장을 얼어붙게 만들고 있다. 자연의 횡포 앞에 인간의 존재가 얼마나 보잘 것 없는 것인지 새삼 돌아보게 한다.
작년의 경우 금년 태풍의 초속(初速)에는 도저히 따를 수 없는 것이었지만, 나의 경우 피해는 더 컸다. 높은 지대에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태풍의 진로에 따라 피해도 달라지게 된다는 것을 이번에 알았다. 이번의 경우에는 베란다가 있는 바다 쪽이 아니라 산이 있는 뒤쪽이었기 때문에 주방 쪽의 자그마한 창들은 그 강력한 태풍에도 버텨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작년의 경우는 바다 쪽에서 밀어붙이는 태풍은 그 큰 베란다의 유리창을 타원형으로 휘어지게 만들면서 창틀이 금시에라도 튀어나올 듯이 덜커덕거렸다. 나와 아내는 그 창틀을 붙들고 서서 부들부들 떨면서 하나님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평소에 교회는 나에게 완전한 소외지대였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런데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때 유리창이 강풍에 견디지 못하여 박살이 났더라면 아내와 나는 전신에 유리조각이 박혀 저세상으로 떠났을 것이라는 친구들의 아슬아슬한 후일담이다. 그러나 붙들고 떨다 못해 거실로 들어와 잠깐 쉬는 동안에 아무렇지도 않던 그 옆 유리 창틀이 벗겨지면서 유리창이 박살이 나서 강풍과 함께 유리 조각이 거실에까지 튀어 들어와 나는 뜬눈으로 아수라왕이 제석천(帝釋天)과 싸운 마당인 수라장(修羅場)을 목격했다. 아내는 옆에서 계속 떨고 있었고, 딸은 한쪽 구석에 서서 합장한 채 기도하고 있었다. 그런 공포도 한 시간 남짓, 딸의 기도 덕분인지 바람은 수그러지기 시작했다. 두근거리는 심장을 억제하지 못해 청심환을 찾았지만 보이지 않아 괜할 활명수를 한 병 들이켰더니 그나마 마음이 조금 가라앉았다.
태풍이 지나간 며칠 뒤 나는 서울에서 집으로 내려왔다. 바다 가까운 저지대인 주택가와 시장 주변에는 쓰레기가 산더미로 쌓여 있었다. 바닷물이 만조(滿潮) 때의 폭우로 일어난 역류현상이 그 원인이었다. 오동도와 바닷가에 있는 횟집이나 상가를 덮친 파도에다 전기합선으로 인한 화재까지 발생한 식당들은 까맣게 그을린 동굴로 변해 있었다. 돌산 일대의 비닐하우스들은 앙상한 뼈대만 남아 엿가락처럼 휘어진 철골은 원시동물의 잔해를 보는 듯이 삭막했다. 바다에는 갈가리 찢긴 양식장의 어망들이 일그러진 어민들의 슬픔을 안고 저녁놀과 함께 저물어가고 있었다.
현대의 첨단과학은 핵폭탄 등 인간 살육의 기술만 연구할 뿐, 태풍의 눈을 녹여 이런 참사를 사전에 예방할 수 있는 연구는 왜 외면하고 있는지 안타깝기만 하다.
그 무섭던 날은 가고 계절은 바뀌고 있다. 지난날은 슬프고 괴로웠지만, 다시 열리는 내일은 밝고 즐거워야 할 것이다. 하늘이 인간의 오만에 분노하게 해서야 되겠는가. ‘매미’소리는 소년 시절 여름철의 낭만으로 되돌아가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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