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좋아하는 것들 / 정임표
나는 직선을 좋아한다. 학창시절에는 밥숟가락도 직각으로 든다는 사관학교를 동경했을 정도로 직선을 좋아한다. 나는 운전할 때도 직선으로 운전한다. 죽 가서 90도로 꺾어서 또 죽 가는 길을 선호한다. 질러가는 샛길이 있어도 그런 길로는 차를 몰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다른 사람들보다 길눈이 어둡고, 모임장소 같은 곳을 잘 찾지 못하여 자주 약속시간에 늦고 만다.
나는 한여름 날 냉수에 보리밥을 말아서 훌훌 먹는 것을 좋아한다. 깊은 우물물을 길어다가 식은 밥 한 덩이를 말고 잘 익은 살구빛깔이 도는 날된장에다 풋고추를 찍어 먹는 맛은 만한전석이 따라올 경지가 아니다.
나는 한 떼의 소녀들이 몰려가며 까르르 웃는 소리를 좋아한다. 그렇게 구김 없이 웃어 본 날이 언제였던가를 생각하며 길을 가다가도 한 참을 멈추어 서서 바라보기까지 한다. 그들의 웃음소리를 들으면 하늘이 한층 더 높아 보인다.
나는 일상의 업무를 상담할 때에 전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상냥한 목소리를 좋아한다. 그런 목소리는 젊은 여성인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건강한 그 울림이 나를 신뢰한다는 마음으로 가득 차 있는 듯하여 묻지 않은 것까지도 친절하게 가르쳐 주고 싶어진다. 그런 목소리와 통화를 하고 나면 오늘 하루도 만사가 형통하리란 기대에 부풀게 된다.
나는 노(no)란 말보다 예스(yes)란 말을 좋아 한다. 만사 예스(yes), 막힌 곳 없이 예스(yes), 오 예스(yes). 이 얼마나 듣기에 좋은 말인가.
나는 말도 솔직 담백하게 하는 것을 좋아 한다. 좋으면 좋다. 싫으면 싫다고 하고 남이 표현하기를 기다리기보다는 내가 먼저 말하는 것을 좋아한다. 애매모호한 태도를 취하지 않고 내 의견을 서둘러 말하기를 좋아한다. 자기 생각을 늦게 말하는 것은 신중하다기보다는 계산적인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단어는 호연지기다. ‘호연지기’란 맑은 기운이 만들어 내는 진취적인 기상이다. 계곡의 물들이 한곳으로 모여 폭포수로 떨어지는 순수한 기백이다. 막힘이 없이 곧게 뻗은 시원시원함이다. 내 어찌 이 말을 좋아하지 않을 수 있으랴.
나는 과일 중에서 수박을 좋아한다. 둥글둥글 모가 나지 않은 모습도 모습이려니와 칼을 대면 ‘쫙’하고 쪼개지며 붉은 속을 다 드러내 보이는 파열음이 그렇게 좋을 수 없는 것이다(수박은 사실 아들이 나보다 더 좋아한다). 그 수박 한 조각을 입에 물고 대청에다 배를 깔고 뒹굴뒹굴 굴러보라. 살갗에 닿는 늙은 소나무 마루판의 촉감을 벗 삼아 한껏 게으름을 부려보라. 진시황제도 부럽지 않을 것이다.
나는 비개인 아침 숲길을 걷기 좋아한다. 태양이 늦잠에서 깨어날 때쯤이면 나뭇잎들은 물위로 뛰는 잉어처럼 싱싱하고 거미줄에 달린 물방울들은 보석보다 찬란할 것이다. 촉촉한 그 아침의 흙길을 초로의 아내와 손을 잡고 걸어보라. 얼굴에 와 닫는 선선한 바람이 지난날의 애환들을 깡그리 씻어내고 세상의 축복을 온통 내게로만 데려오고 있음이 느껴지리라. 그 길에서 걸음이 가벼워지지 않는다면 그대의 이름을 목석이라 불러야 하리라.
나는 장난치는 것을 좋아한다. 마음이 통하는 여인과 악수라도 할 때면 손바닥을 검지로 간질이기도 하고 한눈팔고 있으면 다가가 “벌레 봐라!”하며 노래키기도 하는 것이다.
나는 또 통하는 친구들을 만나 막걸리 마시는 것을 좋아한다. 꾀죄죄한 세상사를 떠나 계곡의 너럭바위에다 자리를 깔고 큰 잔에다 수더분함을 가득 부어서 들이켜면 사내로 태어난 진정한 의미를 알게 된다. 술이 한 순배 거나해지면 화선지를 깔고 일필휘지로 문심을 휘두르고 싶지만 붓글씨와 시문을 배우지 못했으니 이는 내 희망사항일 뿐이다.
나는 또 골프를 좋아한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해서 드라이버 치는 것을 좋아한다. 파란 잔디 위의 푸른 하늘을 향해 호쾌하게 뻗어가는 백구의 그 직진성을 좋아한다. 오비(아웃오브바운즈)가 나든, 스코어가 어떠하든 괘념치 않으니 티 박스에 서서 움츠려 들지 않는다. 빨래줄처럼 곧게, 멀리, 그리고 한없이 뻗어나가는 공을 바라보고 있으면 내 운명도 그렇게 바로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이다.
그리고 놀이터에서 뛰노는 아이들의 소리, 시장에서 상인들이 “골라! 골라!”하며 외치는 소리. 매미 울음소리, 바람 소리, 새 소리, 물소리 같은 살아 있는 것들이 만들어 내는 이런 소리들을 좋아한다. 직삼각형의 다른 두각의 합이 늘 90⁰ 이듯이, 변하면서도 변치 않는 그런 솔직함들을 나는 정말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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