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물망? 그물망! / 허창옥
나무와 사람, 빛과 꽃을 감상한다. 그의 소재는 그렇듯 사람과 자연이다.「나무Ⅰ」「나무Ⅱ」에서 한 그루의 나무를,「기억의 바다Ⅰ」「기억의 바다Ⅱ」에는 익명의 한 사람을 보여주고 있다.
봉산문화거리를 바쁘게 걷다가 불현듯「회화적 그물망」이라는 포스트를 보았다. 회화적 그물망? 그물망! 홀린 듯 이끌려 들어갔다. 햇살이 이슬방울 혹은 꽃송이 형상으로 자우룩 쏟아지고 있는 나무 앞에 선다. 한참을 서서 바라본다. 눈부시도록 맑고 곱다. 「기억의 바다Ⅰ」은 긴 머리의 여인이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흐르듯이 걸어가는, 그러니까 노을 지는 해변을 산책하는 정경(그게 맞는지 모르지만)이다. 붉은 노을과 푸른 바다 그리고 속살이 비칠 듯 엷은 원피스를 입은 여인이 파스텔 톤의 화면 속에 혼재한 채로 느리게 흐른다. 그림 속 여인의 머릿결을 만지고 나온 미풍이 내 뺨에 와 닿는 느낌이다. 몽환적이다.
나무에서 사람, 사람에서 나무로 나도 그림 속 여인처럼 흐르듯이 걷다가 「기억의 바다Ⅱ」 앞에서 발이 묶인다. 그림을 전문적 시각으로 바라보고 감상을 말하는 건 내 능력 밖의 일이다. 그러니 채색과 구도가 어떻다 할 수 없고 구상이니 추상이니 분별해서 말할 수도 없다. 다만 본 대로 느낀 대로 말할 수는 있겠다.
40대의 화가이다. 그의 그물에 한 남자가 걸려있다. 그림의 표면은 모시나 삼베 같은 직물, 또는 평면으로 펼쳐진 촘촘한 채를 닮았다. 수천수만 번의 가는 붓질이 씨줄과 날줄로 교직되면서 자연스레 형성된 농담과 음영이 바탕을 이루고 있다. 모든 색을 섞으면 검정색이 되듯 붓질의 반복과 겹침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마침내 검푸른 형상의 사람모습이 그러난 것일 터였다. 한 마디로 요약하면 ‘무거우면서도 신비하다.’이다.
초록과 파랑, 보랏빛과 남빛이 농담을 달리하며 종횡으로 교차하고 번져서 푸르스름한 바다 같기도 하고, 피안에 있을 미지의 어떤 세계인가도 싶다. 그 화면의 왼쪽, 적갈색의 대지에 발을 디디고 무한 공간을 바라보는 남자에게서 적막이 느껴진다. 태초의 어느 새벽에 세계와 마주하고 있었을 첫 번째 남자의 뒷모습이 저랬을까. 아직 드러나지 않은 세계와 맞서야 하는 그의 두려움을 화가는 저런 모습으로 나타낸 것일까. 아니면 웬만큼 살아내고도 여전히 타자 또는 세계와 화합하지 못하고 단절된 현대인의 절대고독을 저리 표현했을까. 세계와 맞선 두려움, 세계와 단절된 절대고독, 그렇다면 그림 속 남자는 화가 자신이며 또한 내가 아닐 것인가.
수천수만 번의 붓질 끝에 화가의 그물망에 걸린 나무, 남자, 여자의 이미지가 내게 주는 메시지는 예사롭지가 않다. 나무, 사람, 그런 일상적 소재에 상상력을 더하여 미학적으로 형상화한 작가의 시선이며 심상이 나를 설레게 한다. 바라보고 또 바라보며 한없이 바라보았을 때 잡힌 형상을 두고, 얼마나 오래 그리고 깊이 사유하였을 것인가. 수많은 상(像)들이 잡히고 지워지기를 거듭한 끝에 나무와 사람과 빛이 비로소 그에게 낯익은 얼굴로 다가왔음이라. 그리하여 결코 간단치 않았을 첫 붓질이 시작되었을 터였다.
그림을 대할 때 내가 언제나 떠올리는 건 빈 캔버스 앞에 서 있는 화가의 모습이다. 막막함, 첫 붓질을 시작하기까지 화가가 견뎌내는 그 막막함을 생각하면 숨이 막히곤 한다. 길고 막막한 시간, 그 시간이 가져왔을 긴장감으로 터질 듯이 팽팽한 작업공간을 가늠하면 가슴이 벅차다. 농담과 음영으로 평면을 공간적 아름다움으로 환치하고, 형상이나 현상을 거르고 걸러서 표현하고자하는 이미지로 창조해내는 화가의 고뇌와 노고를 짐작한다. 그가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무엇이며, 전하고자 하는 진실은 또 무엇인가를 그림 속에 투영되어있을 작가에게 질문하고 그 대답을 들으려 애쓴다.
회화적 그물망. 특히 그물망이란 말에 매혹되었다. 한 번도 그리 이름 지은 적은 없지만 내게도 문학적 그물망은 분명 있었을 터, 화가의 ‘회화적 그물망’이 나의 ‘문학적 그물망’에 걸린 것이다. 그에 대해서 나는 아는 게 없다. 그의 작품세계도 잘 모른다. 하여 작품에 대한 나의 해석은 화가의 의도와 상당한 괴리가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것은 염려하지 않는다. 무릇 작품은 작가의 손을 떠나면 이미 그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문제는 대상을 바라보는 내 시선의 치열함과 진정성에 있는 것이다. 대체 나는 ‘회화적 그물망’이라는 제재를 형상화하기 위해 얼마나 깊이 천착하고 오래 고뇌한 것인가. 그런 날카로운 물음과 모호한 대답을 혼자 주고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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