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수필세상/좋은수필 2

[좋은수필]진짜 이유 / 이윤기

진짜 이유 / 이윤기

 

 

오랑우탄이라는 동물을 아시지요? ‘오랑우탄’이라는 말은 이 동물이 많이 사는 나라 말로 ‘숲의 사람’이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이게 ‘숲의 사람’이라는 이름을 얻은 경위가 재미있습니다.

 

오랑우탄은 혼자 다니기를 즐긴다고 합니다. 혼자 어슬렁어슬렁 숲속을 돌아다니는 이 동물을 보고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했을 테지요.

 

고독은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것인데 저 짐승이 홀로 고독을 즐길 줄 아는 것을 보니 기특하다. 저 짐승을 앞으로 ‘숲의 사람’이라고 부르기로 하자……

 

그러나 오랑우탄은 고독을 좋아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랑우탄은 대단한 대식가에다 미식가를 겸한다고 하지요. 거기에다가 덩치도 굉장히 큽니다. 이러니 무리를 지어가지고 다니다가는 배불리 먹을 수가 없지요. 그래서 혼자 다니는 것이지요. 고독을 좋아해서가 아니고요. 따라서 자신의 고독을 ‘대도시 오랑우탄의 고독’으로 은유한 한 여류시인은 뭘 몰랐던 것이지요.  

 

투우사가 싸움소 앞에다 흔드는, 우리의 양면 보자기와 흡사한 물건을 스페인 말로 ‘물레타’라고 하다더군요. ‘물레타’는 두 가지 색깔로 되어 있습니다. 소를 향하는 쪽은 붉은색, 투우사 자신을 향하는 쪽은 노란색입니다. 내가 무슨 소리를 하려는지 벌써 아시지요? 얼핏 보기에는, 투우사가 붉은 물레타로 싸움소를 흥분하게 만드는 것 같지만 실제로 흥분하는 것은 싸움소가 아니라 관중인데, 그 까닭은 소는 색맹이어서 세상의 모든 색채를 흑백으로만 인식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소년시절에 이어령 선생의 책에서 이걸 읽을 수 있었던 것을 나는 행운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채찍으로 사자를 다스리는 서커스단의 조련사를 아시지요? 우리는 사자가 공격해 올 경우 조련사는 채찍을 휘둘러, 혹은 고압의 전기 충격으로 사자를 격퇴시키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는 군요. 사자를 다루기에 앞서 조련사는 사자를 넉넉하게 먹이고 마음을 가라앉혀둔다고 합니다. 말하자면 사자로 하여금, 조련사를 공격할 필요를 전혀 느끼지 못하는 상태로 만들어둔다는 것이지요. 사자가, 포만감을 느낄 때는 절대로 다른 동물을 공격하지 않는다는 것은 널리 알려져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예외가 있답니다. 다른 동물과 마찬가지로 사자도 자기만의 공간, 자기만의 평화를 누리고 싶어 하는데, 이걸 방해하면 배부른 상태에서도 다른 동물을 공격한다는 것이지요.

 

조련사가 다가가면 사자는 가만히 보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조련사가 어느 선을 넘는 순간 사자는 으르렁거립니다. 자기만의 공간이 침범당하는 순간이지요. 조련사는 채찍을 듭니다. 그러면 사자는 다소곳이 고개를 숙입니다. 채찍에 맞는 것이 무서워서요? 아닙니다. 잘 보세요. 조련사는 채찍을 들면서, 앞발을 뒤로 뽑습니다. 바로 이겁니다. 사자가 다소곳이 고개를 숙이는 것은 자기가 자기만의 공간이라고 상정한 지점에서 조련사가 발을 뽑았기 때문입니다. 사자에게 실로 이 순간은 실락원과 복락원의 착잡한 순간인 것이지요.

 

이상은, 한 일본인 친구와「삼국지」 이야기를 하면서 해본 생각입니다. 말하자면 우리 앎의 허실이라는 주제로요. 그 일본인은 나와는 달리, 개인적으로 유비 3형제보다는 조조를 좋아한다면서 일본에는 자기와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고 하더군요. 가만히 생각해 보니 일본에는 조조를 재평가하는 책이 여러 종류 나와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성공한 정치가이자 장군이라고 할 수 있는 조조가 악당 취급을 받는 데 견주어 실패한 정치가이자 장군이라고 할 수 있는 조조가 악당 취급을 받는 데 견주어 실패한 정치가이자 장군이라고 할 수 있는 유비와 그이 두 아우는 대중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까닭을 놓고 오래 토론을 벌였지요. 끝내 답을 내지 못했어요. 답을 내어보았자, 그날에만 유효한 답에 지나지 않았을 테지만요.

 

그래서 나는 혼자서, 내가 왜 이들을 좋아하는지 그 까닭을 한번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말하자면 분석을 때려엎고 썩‘심정적’인 상태가 되어보았던 것이지요. 그랬더니, 세상에 참 이상한 일도 다 있지요? 일본인 친구가, 조조를 좋아하는 까닭으로 열거했던 조조의 잘난 점들이 내게는 조조를 싫어하는 이유가, 일본인 친구가 유비 3형제를 싫어하는 까닭으로 열거했던 3형제의 못난 점들이 내게는 이들을 사랑하는 이유가 되더라는 것입니다.

 

머리 좋고 아름다운 대학교수를 아내로 둔 어느 친구가 바람을 피웠다고 하지요. 누구와 바람을 피웠는가 하면, 대학교수 아내와는 어느 모로 보나 도무지 비교의 대상이 되지 못하는, 말하자면 우리 사회에서 하찮게 보이는 여자를 상대로 바람을 피웠다지요. 그 여자를 만나 머리끄덩이 잡아 흔들고 온 대학교수 아내가 남편에게 이랬다는군요.

「나는 당신이 바람을 피웠다는 사실만 가지고 이렇게 길길이 뛰는 것이 아니다. 그 여자의 어디가 나보다 나으냐? 나보다 나은 여자와 바람만 피웠어도 내가 이러지는 않을 것이다.」

 

그 대학교수 헛똑똑이 아닌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