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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2

[좋은수필]혼의 배내옷 / 김정화

혼의 배내옷 / 김정화

 

 

소리가 어둠 속에서 맴돈다.

 

잘들 가시게 어서 가시게/ 살아생전 나쁜 기억 향탕수로 씻어내고/ 곱디고운 수의 입고 칠성판에 편히 누워/ 고단했던 세상살이 꿈이려니 생각하고/ 어서 가시게 좋은 대로만 가시게/ 죽은 사람을 염하자/ 썩은 세상을 염하자.

 

세 평 남짓한 소극장 무대이다. 붉게 그려진 북두칠성 병풍이 한가운데 반듯하게 세워졌고, 바닥에는 나무 관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있다. 한켠의 탁자 위에 칠성판이 보이고 자잘한 소도구들도 널브러져 있어서 방금 염습을 끝낸 듯하다. 조명을 따라 고개를 돌리니 유독 벽에 걸린 누런 삼베 수의에 눈길이 꽂힌다.

살아가는 것은 옷 갈아입기가 아닐까. 세상에 태어나면 배내옷으로 맨몸을 감싸게 되고, 부부의 연을 맺는 날이면 혼례복을 입고 통과의례를 거친다. 그러다가 죽어서 삼베 수의 한 벌 걸치고 훌훌 떠나는 것이 우리의 인생이다. 어미의 뱃속에서 내어져 배내옷 입고 세상을 만나듯이 이승의 마지막 날에는 수의로써 죽음의 성장(盛裝)을 하게 된다.

죽음과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코디가 염쟁이다. ‘염쟁이 유씨’의 삶을 가만히 들여다본다. 아버지도 염쟁이였고, 그의 할아버지도 염쟁이였지만, 자신은 염쟁이라는 직업이 싫기만 하다. 그렇게 싫어했지만 아버지의 시신을 염하는 것으로 시작하여 평생을 죽은 사람에게 마지막 길동무 노릇을 한다. 산 사람도 하찮게 여기는 세상에서 지극한 정성으로 시체를 닦고 수의를 입히는 그의 손길에 저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골 패인 주름 사이로 해학이 넘쳐난다. 열 개가 넘는 역을 혼자 소화하는 그는 거침없는 입담으로 광대의 끼를 발휘한다. “죽어 석 잔 술이 살아 한 잔 술만 못허다구들 허구, 어떤 이는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고들 허는데, 사실 죽음이 있으니께 사는 게 귀하게 여겨지는 게여.”

염쟁이의 손에 이끌려 관객들이 무대로 올라선다. 혹자는 기자가 되거나, 상갓집 상주 노릇도 하며, 망자의 딸이 되는 시한부 운명도 겪는다. 담배만 뻐끔뻐끔 피워내는 연기를 하고, 유산상속을 받고자 삿대질도 하며, 아이고 아이고 곡소리를 연발한다. 그러면 앉아있던 관객도 구경꾼이 아니라, 문상객으로 또는 망자의 친지로서 자연스럽게 넋배웅에 끼어들게 된다. 관객들을 쥐락펴락하는 그의 넉살로 현실과 연극의 경계가 허물어진다.

인생은 연극이라고 말한다. 연극 같은 인생이 있는가 하면, 현실 같은 연극이 있다. 인생은 현실이고 연극은 허구지만, 진짜와 가짜가 뒤엉켜서 어떤 때는 연극 속의 인물이 더 진지하고 무대 위에서 풀어내는 삶이 더욱 절절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죽는다는 것은 생명이 끝나는 거지…… 인연이 끝나는 게 아닌 거 같거든…… .”염쟁이의 말에 가슴이 저리다. 죽어서 땅에는 묻혔지만 가슴에 남아있다면 그것은 죽은 것이 아닐 게다. 마음속에서 지워졌을 때 비로소 진짜 죽음인 것이다. 죽음으로써 곁을 떠난 마음을 넋대 같이 붙들고 살아내야만 하는 고통이 얼마나 견디기 힘든 것인 줄 먼저 가버린 사람은 알기나 할까.

죽음을 떠올릴 때 삶이 더 진실해진다. “죽는 거 무서워들 말어. 잘 사는 게 더 어렵고 힘들어.”라는 염쟁이 유씨의 말을 들으며 마음을 추슬러본다. 잘 사는 것은 살아있는 사람에게 정성을 다하라는 것이라고 여겨진다. 산 사람에게 흘리는 눈물이 더 값지다는 것을 유씨는 온 몸짓으로 보여준다.

그러던 어느 날 유씨는 일생의 마지막 염을 하게 된다. 노동현장에서 몸을 날린 아들을 염하는 것이다. 굳은 몸을 정성껏 주무르고 닦아내며 아주 천천히 자식의 몸에 옷을 입힌다. 주검을 싸고 또 감싸는 아버지의 어깨가 조용히 떨려온다. 호곡을 하는 동안 관객들도 상제가 되어 숨을 고를 뿐 말이 없다. 극에 참여했던 한 관객이 망인에게 절을 올릴 때는 흐느끼는 소리가 출렁이듯 객석으로 번진다. 육신과 영혼이 결별할 때 죽음 앞에서 녹여내는 삶의 흔적이 눈물이지 싶다.

아들에게 수의를 갈아입히며 생전에 입었던 옷을 접어 관에 넣는 염쟁이 아버지의 마음은 어땠을까. 입관을 하고 나무못을 치는 아비의 가슴은 피멍으로 얼룩물이 들고 심장은 찢어지다 못해 폭삭 삭아 내렸을 게다. 하지만 아들은 오히려 평온한 죽음이라는 생각이 든다. 첫 배내옷으로 자신을 맞아주던 그 아버지의 손길을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느끼게 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아비가 여미어주는 수의를 입고서 편안히 길 떠날 수 있게 되었으니 이보다 더 행복한 죽음이 어디 있을까.

태어나서 처음으로 육(肉)을 감싸는 것이 배내옷이다. 그렇다면 마지막 육에 입히는 수의는 혼(魂)의 배내옷이지 싶다. 그동안 이승에서 혼이 걸치고 있던 무거운 육신을 벗어두고 가벼운 삼베 배내옷 한 벌 갈아입고 저승의 삶을 다시 시작하는 것이다. 그러니 수의가 곧 배내옷이 아닌가.

살아가면서 입게 되는 진정한 생(生)의 옷은 무엇일까. 아마 육신과 영혼도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운명이라는 옷이 아닐까 여겨본다.

향 내음이 코를 스친다. 한번 살아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