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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2

[좋은수필]호박마차 / 채명희

호박마차 / 채명희

 

 

신데렐라가 탄 마차의 원조는 호박이었지.

모임에 충실하다보면 분위기에 헤어나지 못해 때때로 탈을 낸다. 그날도 그런 날 중의 하루였다. 노래방을 나와서도 흥을 쉬 떨쳐내지 못하고 우쭐거리다 휴대전화를 꺼내보았다. 낯익은 전화번호가 줄을 서 있다. 시계를 보니 한시 삼십분. 세상에, 이 일을 어쩌나. 신데렐라의 마차가 호박으로 변하는 시간과 내가 집에 들어가야 하는 시간이 같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대문은 굳게 잠겨 있고 초인종을 눓러도 기척이 없다. 안주인은 들어오지 않았는데 전등불은 켜 놓은 듯하다.

디딤돌을 놓고 담을 넘을까 생각하다가 은근히 화가 치밀었다. 도둑 행세가 웬 말인가. 그래, 알코올의 힘을 빌려 큰 소리 한 번 쳐 보는 거야. 안 하던 짓 한 번 해 보는 것도 은근히 효과가 있을 거야. 심호흡을 하고 숨을 멈추는 순간, 소리는 속으로 잦아들고 말았다. 안쪽에 있는 빌라 베란다에서 누군가가 내려다 볼 것만 같았다. 그리고 날이 새면 동네에 미칠 파장을 생각하니 몸이 움추려 들었다. 또 한번 벨을 눌렀다. 역시 기척이 없었다.

‘마차를 내어줄 때는 언제고 굳이 호박으로 만들어 버릴 건 또 뭐람. 유리 구두의 주인은 이제 찾을 필요도 없다는 말이지. 그래 누가 더 애타나 두고 보자.’ 어디서 나온 것인지 배짱이 제법 두둑해졌다.

골목 안으로 들어가 작은 대문 문턱에 쪼그리고 앉았다. 서늘한 밤공기를 싣고 시간이 그네를 탔다.

세월이 무더기로 흘러가 버린 것일까.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내가 저 방안에서 남편을 기다리며 초읽기를 하지 않았던가. 늘 일찍 들어와서 아이들과 함게 놀아주기를 바랐었지. 귀가가 늦은 날이면 들어오기만 홰봐라 싶다가도, 밤이 가까워질수록 직장에서 좋지 않은 일이 생긴 것은 아닐까 걱정을 했었지. 휴대전화가 없던 때라 숙직 근무자에게 실례가 될 세라, 애꿎은 전화기만 들었다 놓았다 하며 불안해 한 적도 많았지. 밤을 새워도 좋으니 제발 아무 사고 없이 들어오기만 하면 된다며 마음을 달래다가 이 시간쯤, 아무 일 없다는 듯 멀쩡하게 들어오는 그를 두고 이런저런 반응을 보이던 때가 바로 엊그제만 같은데….

지금 텔레비전의 불빛에 의지하고 있는 그도 그때의 내 모양일까. 촉각을 곤두세우며 아내의 귀가시간을 재고 있는 것일까. 직장에서 회식이니 뭐니 해도 적당한 시간에 자리를 비켜줘야 하는 나이. 술자리의 분위기보다 다음날 출근을 위해 일어서야하는 나이. 누가 무어라 하지 않아도 은근히 뒷자리로 밀려나야하는 나이가 되어버린 남편이 지금 저 방안에서 아내에게 화를 내고 있는 것일까. 어쩌면 한 발국씩 그렇게 물러나야 하는 자신에게 화를 낼 수도 있으리라.

그에 반해 우는 아기 젖 줄 일도 없는 아내. 시집에서 크고 작은 일 다 치러 낸 값으로 당당해질 대로 당당해져 으스대는 아내. 언제부터 막가는 행동파였는지 모르지만 남편보다 도리어 더 큰소리치는 아내. 낮에 다니는 것만으로 부족해 낮같이 활용하는 아내. 일상을 깨뜨리는 늦은 귀가에도 자신이 푸대점 받는다는 느낌 때문에 그 아내는 지금 대문 앞에 쪼그리고 앉아 시위를 하고 있다.

줄다리기가 팽팽하다. 혼자 사는 시누이 집으로 갈까. 아니면 조금 전 헤어진 친구 집으로 갈까. 대문을 열어주지 않았으니 핑계는 확보된 것이 아닌가.

아니야. 그래도 삼 세 판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벌떡 일어나 휴대폰 1변과 초인종을 동시에 힘주어 눌렀다. 대문이 철컥 열렸다 휴, 다행이다.

하지만 내일이면 원조 호박은 또 마차로 변해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