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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2

[좋은수필]소금광산에서 만난 소녀 / 구활

소금광산에서 만난 소녀 / 구활  

 

 

 

동유럽 여행 사흘째 되는 날. 폴란드 비엘리츠카 소금광산 앞에서 한 소녀를 만났다. 소녀는 주말을 맞아 소풍과 견학을 겸해 이곳에 온 것 같았다. 또래들이 이십여 명쯤 되었고 인솔교사 두엇이 아이들의 엇길 행동을 막으면서 광산 입장 수속을 밟고 있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 받은 소금광산은 그 규모와 명성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관광객들이 넘쳐나 주말 입장에는 평균 두 시간은 족히 기다려야 했다. 기다림의 시간은 항상 지루하고 초조한 법. 의자에 앉아 책을 읽고 있는데 햇빛을 막아서는 검은 실루엣이 책장 위에 장막을 친 것 같이 갑자기 어두워졌다. 소녀의 작은 몸집이 태양을 가린 것이다. 치어다보니 소녀의 얼굴은 역광 속에서 흐릿했지만 햇살을 받아 옅은 황금색으로 빛나는 갈색 머리카락은 눈이 부셨다.

소녀는 말없이 내 발 밑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아주 작은 폴란드 동전 한 닢이 떼구르르 굴러와 신발 옆에 떨어져 있었다. '내가 떨어뜨린 동전을 주워갔으면 좋겠는데 혹시 실례가 되지 않을까요'란 뜻을 손가락을 시켜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수화는 농아들끼리의 전용 언어인줄 알았는데 이방인들 간의 대화 수단으로 이렇게 유용한 것이구나' 그렇게 생각하며 동전을 집어주며 입가로 연한 미소를 흘렸다. 소녀는 궁중의 인사법인 무릎을 약간 꾸부리며 고개를 까딱하는 웃음으로 화답했다. 그러곤 저희들끼리 동전 뺏기 놀이에 온정신을 팔고 있었다.

소녀는 값비싼 옷을 입지도, 유명 브랜드 신발을 신지도 않았으며, 머리 모양도 평범하고 단순했다. 그러나 얼굴 중에서 특히 눈매에서 뿜어 나오는 신선한 기운은 사람을 끌어들이는 묘한 매력을 발산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아까 동전을 집어줄 때 소녀가 보여주었던 중세 유럽식 배꼽인사는 산뜻한 용모에 사람됨이 플러스 알파로 작용하여 후한 점수를 따고 있었다.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소녀를 왕족 내지 귀족의 반열에 올려놓고 있었다.

소녀와의 예기치 않았던 조우의 순간부터 나의 턱없는 상상이 나래를 폈다. 소녀의 청순한 이미지를 오드리 헵번에 견주어 보았다. <녹색의 장원>이란 영화 속의 주인공으로 가상 출연시켜보니 이곳은 소금광산일 뿐 숲 속이 아니기 때문에 배역이 걸맞지 않았다.

생각을 고쳐먹고 로마 거리 여기저기를 쏘다니는 <로마의 휴일>이란 영화의 주연 배우로 발탁하여 머릿속에서 신나게 돌아가는 필름 속에 살짝 밀어 넣어 보았다. 소녀는 어느 왕국의 공주로 분한 영락없는 오드리 헵번이었다. 소녀를 앤 공주로 만들고 나니 나는 자동적으로 특종기사를 찾아다니는 아메리칸 신문의 죠 브레들리 기자(그레고리 펙)가 되어 있었다.

그러한 동안 소녀는 동전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다 다른 아이가 힘껏 밀치는 바람에 내가 앉아 있는 곳까지 떠밀려와 엉덩방아를 찧었다. 소녀는 내 손을 잡고 일어나면서 어색한 웃음을 웃었다. 나는 폴란드어가 아닌 영어로 몇 살이냐고 물었다. 이심전심은 쉽게 통하는 법. 소녀는 내 말을 얼른 알아듣고 양쪽 손가락 열 개를 활짝 펼쳐 보였다.

소녀의 그러는 모습이 하도 천진하고 난만스러워 친근의 표시로 무엇을 주고 싶었다. 호주머니에 손을 넣어보니 줄 것이라곤 아무 것도 없었다. 그들의 동전놀이에 도움이 될까 싶어 1유로짜리 동전 한 개(우리 돈 1500)를 또래들이 눈치 채지 못하도록 손안에 꼭 쥐어 주었다. 그러고 나서 메모를 위해 갖고 다니던 파커 볼펜을 윗저고리 포킷에 꽂아주니 영화 속 트레비 분수 앞에서 보여주던 오드리 헵번의 해맑은 미소가 소녀의 얼굴에서 금세 피어올랐다.

소녀 일행의 광산 입장 서열은 우리 보다 빨랐다. 인솔교사가 무어라고 큰소리로 말하자 놀이에 빠져있던 아이들이 두 줄로 늘어서기 시작했다. 소녀는 선생님에게 무어라고 속삭이더니 약간의 말미를 얻어 내 곁으로 뛰어 왔다. 소녀는 나의 메모 수첩을 빼앗듯이 받아들고 빈 종이에 방금 받은 볼펜으로 카테(Kathe)라고 썼다. 내가 아주 낮은 목소리로 "카테가 네 이름이니, 카테야."하고 불렀더니 생긋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소녀는 우리의 '짧은 만남'에 이은 '빠른 헤어짐'을 아쉬워하듯 힐끗 한번 돌아보고는 소금 광산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이삼십 분 뒤 우리 차례가 왔다. 삼백 칠십 여섯 개의 통나무 계단을 걸어 지하 64m까지 내려가니 소금 광산의 갱도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2.5km나 되는 코스를 돌며 1493년에 이곳을 방문한 지동설의 주창자인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가 지구의를 들고 있는 소금덩이 조각상을 만날 수 있었다. 그리고 이곳 광산의 인부로 일하던 아마추어 조각가들이 조성한 대성당에 들어서자 나도 모르게 감탄사 대신 기도가 터져 나왔다. 오 하나님 아버지. 당신의 천지창조 이후 인간이 만든 새로운 천지가 대성당으로 태어나 여기 펼쳐져 있습니다. 아멘.

소금 광산 관광이 거의 끝나갈 무렵에 간이식당과 매점이 줄지어 늘어서 있는 넓은 광장이 나타났다. 나는 그동안 구경에 정신이 팔려 나보다 앞서 들어간 소녀를 까맣게 잊고 있었다. 이곳에 들어서니 영화 <로마의 휴일>에서 보았던 광장 끝에 있는 '거짓말하는 사람이 손을 넣으면 손이 빠지지 않는다''진실의 입'이란 입을 크게 벌리고 있는 부조상이 생각났다.

혹시나 싶어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돌아보았다. 텔레파시 비슷한 어떤 강렬한 에너지가 나의 뒷덜미를 강하게 끌어당기는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한갓진 구석에서 소녀 일행이 우리나라의 컵 라면 비슷한 음식들을 먹고 있었다. 나는 우리 일행의 줄에서 빠져 나와 조심스럽게 소녀의 꼬마 친구들이 있는 쪽으로 가보았다.

'카테'가 국수를 건져 먹다 말고 나를 발견한 모양이었다. 처음에는 포크를 쥔 손으로 아는 채를 하더니 '안 되겠다' 싶었던지 그걸 테이블 위에 놓고 나에게 뛰어와 내 오른손을 잡고 뭐라뭐라 폴란드 말로 지껄였다. 나는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오냐오냐, 그래그래."

소망의 벽앞에서 사랑을 하기엔 하루는 너무 짧아요.” 라며 아쉬워하던 영화 속 공주가 생각났다. 이어 영화의 끝 장면이 떠올랐다. 기자는 이렇게 물었다. "이번 여행 중 가장 인상 깊었던 곳은 어디였습니까." 앤 공주가 대답했다. "로마였습니다. 아마 죽는 날까지 잊지 못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