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맷돌 / 이지원
우리 집 베란다에는 돌멩이 두 개가 있다. 꼭 계란만 한 크기의 둥글납작한 돌이다. 반들거리는 품새를 보니 어느 해 여름, 바닷가에서 주워 온 것이 틀림없다. 그동안 금붕어를 키우던 어향에도 들어가 있었고, 화분에 잠시 얹혀 있기도 했다. 바깥 공기가 쐬고 싶어 창을 열거나 화분에 물을 줄 때도 무심히 보아 넘기던 돌멩이였다. 별 소용없이 그냥 붙박이로 남아 있어 여러 번 버리려 했지만 쉬이 그러지 못했다.
지난 휴일, 푸른빛이 누리에 퍼져 있는 청라언덕에 다녀왔다. 청라언덕은 역사가 깊은 병원 안에 있었고, 그곳에는 푸른 담쟁이가 붉은 벽돌을 덮고 있는 ‘의료선교박물관’ 이 있었다. 박물관은 개화기 때 선교사들이 지어서 살던 집이었다. 선교사의 집은 기와지붕 아래 붉은 벽돌로 지어서 동양과 서양이 혼재된 모습으로 세월의 더께를 얹고 고색창연했다.
백돌 아래 주춧돌은 읍성을 허물 때 나온 것이라고 한다. 왕조가 무너지고 새로운 문명이 들어왔음을 알리는 징표를 보는 것 같았다. 한 시대가 끝나고 새로운 시대가 열리는 과도기의 모습이었다. 스러져 간 왕조의 유물을 바라보며 시대가 바뀌어 역사의 뒤안길에 섰던 사람들을 잠시 생각했다.
선교사가 머물렀던 붉은 벽돌집 이층에는 당시 목회를 하며 사용했던 성물(聖物)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그곳에서 우리 집 베란다에 있는 돌멩이와 꼭 닮은 돌을 보게 되었다. 그 돌에는 ‘물맷돌’ 이란 생소한 이름이 붙어 있었다.
힘이 형편없이 모자라서 싸워 봐야 질 것이 불을 보듯 뻔한 사람이 상대를 거꾸러뜨린 경우를 으레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 에 견준다. 일개 목동에 불과했던 다윗이 골리앗을 대적하겠다고 나섰을 때, 골리앗은 물론 많은 사람들도 다윗이 이길 것이라고 생각지 않았다. 다윗은 시냇가로 가서 매끄러운 돌 다섯 개를 골라 양을 칠 때 사용하는 지팡이와 물매만 가지고 골리앗을 향해 나아갔다. 골리앗은 다윗을 보고 비웃었지만 다윗은 주머니에서 돌 하나를 꺼내어 물매에 넣어 상대를 향해 날렸다. 물맷돌은 골리앗의 이마에 정통으로 맞았고 골리앗은 넘어졌다.
세상 이치라는 것이 해답이 있는 것도 같지만 누구도 짐작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나기도 한다. 거대하고 힘 센 골리앗을 어떻게 당해낼까 모두 걱정할 때 다윗은 주머니의 돌 하나를 만지작거리며 ‘목표물이 거대하니 절대 빗나가진 않겠군.’ 이렇게 생각했다.
오월의 신록에 마음까지 푸르게 물들 것 같았던 그날, 청라언덕의 안과 밖의 분위기는 사뭇 선명하게 구분되었다. 다소 강렬한 햇살에 초목은 제 존재를 마음껏 드러내었고, 박물관 마룻바닥의 서늘한 감촉과 스테인드글라스의 오묘한 빛은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혔다. 그 속에서 물맷돌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그러나 당당한 모습으로 놓여 있었다. 어떤 이의 손에 쥐여지는가에 따라 결과가 달라지는 물맷돌이 몹시 인상적인 모습으로 마음에 남았다.
살다 보면 시시때때로 난관에 부딪힌다. 때로는 벽을 만나 지레 기가 눌릴 때가 있다. 뭔가를 하려고 시도했다가 시작도 하기 전에 주저앉아버린 적도 있었다. 그런 내가 새로운 일에 도전을 했다. 많은 생각이 교차했다. 내 나이에는 할 수 있는 것보다 할 수 없는 것이 더 많다. 시작도 하기 전에 스트레스를 받는다면 하지 않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고 어떤 친구가 말했다. 그때는 그 말이 위안이 되었고 실제로 그렇기도 했다.
남들보다 약한 시력 때문에 제대로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마음을 극복하고 싶다. 그런 애절한 소망이 내게는 있다. 제대로 해냈을 때 자신의 당당한 모습을 다른 누구도 아닌 스스로에게 보여주고 싶다. 진화하는 세상의 많은 것과 같이 생각도 한 곳에 머물러 있지 않고 변한다. 그렇지 않았다면 나는 다시 일을 할 수 없었다.
‘의료선교박물관’에서 본 사진 속의 오래된 세월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간다. 언어도 풍습도 생경한 곳, 기독교의 씨앗을 뿌리러 온 선교사들의 모습 속에서 물맷돌을 만난다. 물맷돌은 지향하는 곳을 향해 나아가려고 애를 쓸 때마다 넘어야 할 장애물을 극복할 수 있게 하는 ‘지혜의 돌’ 이 아니었을까. 신이 그들의 주머니에 넣어 준 물맷돌은 해낼 수 있다는 소망을 담은 돌이었는지 모른다.
이른 아침 창을 연다. 눈을 들어 시선을 두는 곳마다 청록의 바다다. 녹색 너머에 이팝나무 꽃이 소복하게 피어 있다. 멀리 던졌던 시선을 내려놓자 실외기 위에 얌전히 놓여 있는 두 개의 돌멩이에 눈길이 머문다. 이제 보니 이것이 지금의 나에게 꽃 필요한 물맷돌이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 손 안에는 두 개의 돌이 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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