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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2

[좋은수필]춤추는 땅 / 반숙자

춤추는 땅 / 반숙자 

 

 

후미실 댁 허리통만한 두둑을 타고 앉아 고구마를 캔다. 앞에서는 남편이 고구마 줄기를 낫으로 걷고 비닐을 벗겨내며 이마에 땀을 닦는다.

 

봄에 고구마 싹을 심을 때다. 읍내에서도 한참 후진 이 골짜기에 미끈한 승용차들이 자주 드나들었다. 가끔 그 차들은 우리 밭머리에 멈춰 "풍경 좋은데요" 하며 말을 걸어오기도 하고 앞뒤에 있는 이웃 과수원을 훑어보기도 했다.

 

그런 어느 날, 비닐 씌운 두둑에 볼펜보다 가는 싹을 심고 있는 것이 미심쩍었던지 승용차에서 내린 신사가 밭으로 들어섰다. 신사는 심각한 얼굴로 고구마 싹을 살펴보다가 "고생 많으십니다" 하고는 지나가는 말로 땅을 내놓은 사람이 없느냐고 했다. 아마도 신사의 눈에 우리가 하는 일이 가망 없어 보였던 모양이다. 그러니 헛수고하지 말고 밭을 팔라는 간접적인 의사 표현이 아닌가 싶었다.

 

땅을 내놓은 사람이야 왜 없었겠는가. 그 동안 농민들은 한눈 한 번 팔지 않고 땅만 팠다. 땅을 파서 자식들 공부시켰고 세금 내고 반듯한 냉장고도 샀다. 그러다 보니 나이는 들고 허리는 굽어 농사를 지을 기력이 없다. 정년은 넘었으나 일은 그대로이고 연금은커녕 몸에 병만 들었다.

 

자식들은 죽어도 시골에 내려와 살지 않겠다 하고 하늘같은 농토를 놀리는 일은 죄짓는 일이니 놀릴 수도 없고 노후 자금은 꿈도 꿀 수 없는 실정. 그래서 앞 다투어 땅을 내놓았지만 그 동안 누구 하나 거들떠보지를 않았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십여 년 간 꿈쩍 않던 땅이 작년부터 승용차가 드나들기 시작하더니 건너편 배밭이 팔렸다 하고 이웃 사과밭이 팔렸다 했다. 어인 일인지 임자가 바뀌고도 옛 주인이 계속 농사를 짓고 있다.

 

사실 볼펜보다 가는 줄기를 꽂아놓고 시들어 가는 모양을 볼 때면 고구마 먹기는 틀렸구나 단념도 했다. 그러다가 비가 한줄금 내린 뒤에 가보면 배배 틀어지던 줄기가 꼿꼿이 서면서 새순이 올라오는 것이다. 그것도 잠시 주말에나 가는 내가 밭둑에 서면 달리기 선수들처럼 대지를 잠식하는 푸른 잎새가 너울너울 파도를 쳤다. 그리고는 푸른 파도는 두고 보라는 듯 만삭의 두둑을 감추어 놓고 하늘은 높아만 갔다.

 

어설픈 농부는 심는 일보다 수확하는 일이 좋다. 가을 가뭄으로 김장 배추는 잎이 시드는데 고구마골 비닐 속의 흙은 촉촉하고 부드럽다. 식물의 생육을 위한 최적의 조건이다. 누가 촌부 아니랄까 봐 나는 또 씨를 뿌리고 싶다.

 

장갑 낀 손에 호미를 거머쥐고 고구마 줄기가 곤두선 자리를 비껴 45도 각도로 호미 날을 꽂아 흙을 파낸다. 오른쪽 왼쪽을 번갈아 하다보면 호미 날에 전해 오는 감이 있다. 그것은 낚시를 할 때 물고기가 떡밥을 입질하는 순간과 같다. 긴장감이 온몸으로 번져온다.

 

삼십여 년 농사를 지어온 경험으로 본줄기 바로 밑에 네다섯 개가 직립으로 달려있는 것이 보통이다. 그럴 경우 고구마 캐는 일은 간단하고 이랑이 그득하게 풍작인 것도 당연하다. 올해는 빈 줄기가 많다.

 

지난봄부터 가는 데마다 "땅" "땅" 땅 천지가 되었다. 멀지 않은 곳에 현신도시가 들어온다는 결정이 난 후로 부동산동네가 발칵 뒤집히다시피 하고 조그만 읍내에 공인중개소가 이십여 개 들어섰다. 덩달아 땅값이 치솟기 시작했다. 평당 3만원 하던 밭이 5만원으로 뛰더니 자고 나면 뛰어 올라 십만 원, 십오만 원 야단이 났다.

 

정말 땅이 춤을 추는 것이다. 덩달아 농민들도 춤을 추었다. 춤추며 우는 농민들도 많다. 작년에 땅을 판 사람들은 자신들 눈앞에서 판 땅을 되팔아 큰 이익을 챙기는 외지인들을 보기 때문이다.

 

고구마 캐는 일이 재미가 없다. 일껏 흙을 파내 놓고 보면 어린애 주먹만한 것이 한두 개뿐이니 흥이 나지를 않는다. 일손을 놓고 하늘을 본다. 하늘 가까운 오성산 높은 봉부터 물들어 가는 단풍을 보고 있는데 윗밭을 샀다는 서울 사람이 옆에 와 앉는다. 그는 주말마다 내려와 밭을 둘러보는데, 이 고구마밭을 자기네 집터로 팔라고 조르는 중이다.

 

그것도 모르고 남편은 열심히 고구마를 캐고 수확에 상관없이 천직인양 묵묵히 자기 일을 하는 굽은 등이 오늘따라 외로워 보인다. 그때, 무슨 대단한 소식인양 "여보, 고구마가 바람이 난 겨. 그렁께 둑만 파지 말고 옆구리를 허벼 봐" 소리를 지른다.

 

남편 말이 맞다. 그토록 왕성하게 줄기가 뻗어 가더니 푹신한 두둑은 허방으로 두고 딱딱한 맨땅에 자잘한 새끼만 쳤다. 고구마도 지각이 있나 보다. 여름내 시끄러운 차 소리에, 들먹들먹 춤추는 땅에 저라고 제정신이 들었겠나. 바람난 고구마 밭을 나무랄 수는 없지 않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