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수필세상/좋은수필 2

[좋은수필]다큐멘터리 / 송은경

다큐멘터리 / 송은경

 

 

 

누 떼의 이동이 장관을 이룬다. 풀을 찾아 움직이는 초식동물을 맹수가 덮친다. 힘없이 쓰러지는 누는 무리를 잃어버리고 홀로 죽음을 맞이한다. 텅 비어버린 누의 눈망울이 화면에 가득하다.

어두컴컴한 방 안, 친구의 침대에 누워 나는 텔레비전만 보고 있다. 삶을 놓치고 싶지 않아서인지, 차라리 저 누처럼 희망이 없음을 깨닫고 포기하고 싶어서인지, 자신에게 수없이 되물어 보지만 아직 알 수 없다. 때가 되면 친구가 차려주는 밥을 먹고 가끔 친구의 손에 이끌려 시장을 나가고 팔공산 자락을 누빈다. 거칠고 용감한 친구의 운전이 이럴 때는 답답한 내 속을 오히려 시원하게 풀어준다.

깊이를 알 수 없는 절벽의 어느 지점에 몸을 꽂은 나를 친구는 아무 말 없이 일주일째 기꺼이 받아주고 있다. 친구의 남편도 두 아이도 나의 방문을 모른 척 자리를 피해 불편해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준다. 고맙다. 하지만 마음 끝자락에도 그들을 넣어 둘 수 없다. 나는 지금 사생결단을 하며 치열한 생존의 현장을 찍고 있다. 드라마가 아닌 다큐멘터리 인생의 한가운데서 마치 맹수 앞에서 죽어가는 누처럼 나는 이 집에 고립되어 있다.

결혼해도 독립하지 못하는 남자 때문에 힘들어하는 여자의 이야기로 드라마의 시청률은 올라간다. 순위권에 들어 있는 드라마 대부분이 슬픔과 아픔을 피해가고 싶은 수많은 여성들의 대리만족으로 만들어지지만 비현실적이다. 드라마의 결말은 한결같다. 카타르시스가 완벽하게 이루어지는 훈훈함으로 마무리된다. 현실에서 누릴 수 없는 행복과 고생 끝에 오는 낙을 누리고 싶은 여자들의 꿈이 드라마 곳곳에 진을 치고 있다. 그래서 현실은 더 슬프다. 이혼한 여자에게 돈 많고 잘생기고 친절하기까지 한 드라마 속의 멋진 남자는 없다. 홀로서기를 작정하고 나선 길이라 그런가. 삶은 누의 죽음처럼 처절할 뿐임을 되새기게 된다.

참고 살아가는 것도, 이쯤에서 접고 새로운 길로 나아가는 것도 삶의 현장이다. 드라마 같은 포장된 삶이 나에게 와 준다면 그야말로 기적이다. 그녀처럼 예쁘지도 능력 있지도 않은 그저 그런 삼십 대의 평범한 아줌마에게 기적은 쉽게 일어나지 않는다. 세상의 뻔한 이치를 너무 잘 알기에 나는 자꾸만 빛을 거부한 채 방 안을 어슬렁거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삶이란 온통 늪이었던가. 아름다운 거라고 내디딘 한 걸음이 십 년이 지난 어느 날에서야 목까지 차오르는 늪이었다는 것을 발견하다니. 한 호흡을 놓치면 내가 사라지고 말 것이라는 불안에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었다. 힘을 주면 줄수록 더 깊이 빠져드는 늪에서 살아 나온 건 기적이었다. 운동부족이라는 남편의 말에 밤새도록 아파트단지를 뛰어다녀도 낫지 않던 호흡곤란이 알약 하나로 회복되는 것을 보며 안도감에 앞서 내 삶의 서글픔에 더 목 놓아 울었던 시간. 어쩌겠는가. 내가 선택한 삶이고 스스로 들어간 늪인 것을.

십 년 동안 마음자리를 내 주었던 곳에서 나는 기어이 반란을 일으키고 만 것이다. 내쉬는 날숨만으로 살았던 아내, 엄마, 며느리의 자리는 막내딸로 자란 내가 감당하기에는 벅찬다. 들숨이 모자라 숨이 턱까지 찼건만, 남편은 모른 척 그리고 기세등등했다. 언제나 자신만만하게 떠나라고 큰소리치던 남편이었다.

남편의 더듬이가 촉을 세우고 사태 파악을 한 지 일주일 만에 친구의 전화벨이 울렸다. 마주함의 끝자락에서 만난 아이들을 보며 나는 다시 한번 치를 떨었다. 나의 모습이라 여겼던 죽어가는 누의 텅 빈 눈망울이 더욱 크게 아이들 눈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더 물러날 곳을 두지 않았지만, 내가 떠난 자리에서 선택의 여지 없이 울타리를 잃어버릴 아이들을 위해 나는 엄마의 자리를 지키기로 했다. 어찌할 줄 몰라 하며 방향을 잃어버린 남편의 더듬이 앞에 치받쳐 오르는 무수한 생각을 한번 더 꿀꺽 삼키기로 했다.

함께 늪에서 나와 보니 모두가 상처투성이다. 서로 지지 않으려고 힘을 주며 상대를 짓눌렀으니 누구인들 온전할 리 있으랴. 드라마의 마지막 장면처럼 한 가정의 새로운 시작은 제자리를 찾았다. 변화가 없다고 편안한 것은 아니다. 부딪혀 깨진 부분을 끼워 맞추며 나는 잃어버린 온전한 호흡을 찾아간다. 들숨과 날숨이 조화롭다는 것은 어느 정도의 불공평과 불합리를 받아들이는 것, 상대에 대한 배려와 양보를 마주 보며 이어가는 것이다.

맹수가 두려워 초원을 이동하지 않는다면 수십 미터의 강을 죽음을 불사하고 건너지 않으면 누 떼는 전멸할지도 모른다. 고통 없이 찾아오는 행복은 없다. 자연의 법칙대로 푸른 초원을 찾아 이동하는 누 떼는 고통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내 삶이 온전한 드라마가 되기를 원하지 않는다. 힘들었지만 무사히 강 하나를 건너온 지금, 나는 조금 편안하다. 십 년 동안의 결혼생활을 끝내는 것만이 길일 것 같은 마지막 선택에서 생각지도 못한 삶의 유턴이 있음도 알았다.

기나긴 여행이 끝나고 새롭게 자리를 잡은 초원에 평화가 찾아온다. 제자리를 찾은 누 떼들이 한 폭의 그림처럼 살아 움직인다. 부드럽게 흔들리는 어린 풀들이 초원의 바람 앞에서 더욱 건강하다. 편안한 누 떼의 호흡이 하면 밖으로 흘러나온다. 밤람한 강물에 그리고 사나운 맹수에게 한 생명을 내어주고 찾아온 편화는 이제 막 걸음을 시작하는 새끼들과 누릴 수 있는 소요(逍遙)의 하루다.

살고 싶기에 내 삶의 여정은 치열하다. 다큐멘터리처럼 날마다 긴장하고 도전해야 한다. 호흡이 힘든 만큼 삶이 치열할 수도 있음을 알았기에 이제 어떻게 다큐멘터리 촬영을 계속 해야 할지 어느 지점에서 증인을 넣어야 하는지는 내 몸이 기억한다. 다행이다. 남편도 나고 고집스럽지 않게 영역을 지켜나가고 있으니.

지나온 여정도 어쩌면 누 떼의 다큐멘터리처럼 내 생의 어느 한 부분에 반드시 필요한 장면이었으리라 믿는다. 희생을 감수하고 차지한 초원에서 새로운 생이 계속 이어지듯이 가끔은 미친 듯이 삶을 향해 돌진할 필요가 있다. 살기 위해 죽는 것이다. 때로는 내 마음속 깊은 곳에서 뿜어져 나오는 소리에 장단을 맞출 필요도 있다. 바람을 타고 드나드는 나의 호흡이 오랜만에 편안하다. 결혼 후 십 년, 적절한 때에 나는 반란을 일으킨 것 같다. 승자도 패자도 없는 일주일간의 가출 덕분인지 나의 초원은 아직도 살아 숨 쉬고 있다. 때로는 드라마처럼 때로는 다큐멘터리인 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