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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2

[좋은수필]난 남자가 좋다 / 임춘희

난 남자가 좋다 / 임춘희

 

 

 

거울 앞에서 한참 머문다. 거무튀튀한 피부에다 뽀얀 화학 물질을 열심히 갖다 붙인다. 눈썹과 입술도 요염하게 칠한다. 모나리자 눈썹을 상상하면서 도화지에 그림을 그리듯 말이다. 환성된 작품인지 확인하고 나풀거리는 치마정장 차림으로 마무리한다. 이쯤 되면 누가 봐도 매력적인 여자다. 물론 신체구조도 여자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현관문을 나서면 여자는 가슴 저 밑바닥에 숨어버리고 잠재되어 있던 남자가 된다. 남자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니 예쁜 여자를 보면 사랑하고 싶은 마음도 생긴다.

난 남자가 좋다. 넉넉하고 푸근함이 멋지지 않은가. 특히 내 어머니의 유별난 아들 사랑이 부러워서 더욱 그런지도 모른다. 사업하면서 만난 사람들한테 가끔씩 우스갯말로 난 아버지의 불량품이라고 말한다. 워낙 약주를 좋아하시다 보니 남자를 상징하는 부분을 잊어버리고 대충 생산한 아이가 나였다고, 남들은 웃음으로 넘기지만 나에겐 뼈가 있는 말이다. 내면엔 여자로 태어난 것에 아쉬움이 깔려 있으니 어쩌면 좋을까.

유년 시절부터 남자가 되고 싶었다. 같은 또래 남자 아이들과 바지를 무릎까지 내려놓고 누구의 오줌 줄기가 멀리 가는지 내기한 적도 있었다. 아랫배에 힘을 잔뜩 주고 최대한 용을 써 보아도 발아래로 떨어졌다. 건들거리며 불어오는 동남풍의 방해라고 우겨댔지만 바짓가랑이 사이를 타고 흘러 내려 검정고무신 안에 고이는 오줌을 보며 계집아이의 한계를 인정했다. 며칠을 상심하면서 다락방에 틀어박혀 고민한 적도 있었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내 모습을 내려다보면서 남자를 상징하는 그것을 찰흙으로라도 만들어 달고 싶었다.

오빠를 따라다니며 남자아이들 하는 놀이를 같이 했다. 스릴을 느꼈다. 고무줄놀이 대신 딱지치기와 구슬치기를 즐겼고, 막대기로 총싸움을 하며 개선장군처럼 씩씩한 걸음걸이를 흉내 냈다. 바람 부는 날 연날리기는 작은 계집아이에게 자신감을 심어줬다. 얼레 조절을 요령껏 해서 높이 올라 마음껏 활개를 치는 연을 보며 내 마음을 실어 가라고 소리쳤다. 놀다 집으로 들어가면 두 살이나 많은 오빠는 나무라지 않고 나만 야단쳤다. 오빠는 하루 종일 놀이도 대를 잇는다는 이유에서 어머니의 눈빛에는 사랑이 넘쳤다.

“이쁜 내 새끼 어여 와. 맛난 것 먹고 공부해야지.”

항아리를 열고 밀가루가 뽀얗게 묻은 엿가락을 들고 와서 오빠에게 내밀었다. 난 부러움에 침만 꿀꺽 삼켰다. 오빠는 책을 가방에 넣고 다녔지만, 난 보지기에 싸서 다녔다.

어느 날 오빠가 서서 볼일을 보는 것을 보고 퍼뜩 생각이 지나갔다. 나하고는 차이가 바로 그것이었다는 것을. 그 후로 서서 볼일을 보니 옷만 버렸고 엉뚱한 행동에 이유를 모르는 어머니는 부지깽이를 들고 와서 몸에 줄이 서도록 때렸다.

“이 가시나가 인간이 될라 카나 말라 카나. 다 큰 기 왜 오줌을 싸노?”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내 속을 몰라주는 어머니가 야속했지만 부정할 수 없는 현상이었다.

방과 후엔 숙제할 틈도 주지 않았다. 어머니의 눈을 피해 공책이라도 펼칠라치면 야단을 쳤다. 부모님은 농사일에 매달려 있는지라 입안일은 내 차지였다. 동생 돌보기와 집안 청소, 소죽 끓이기에다 저녁밥까지 지어야 하니 여남은 살짜리 아리가 하기엔 벅찬 일이었다. 그래도 군소리 한 번 못 하고 해야 했다.

“쓰잘데기 없는 지집아가 공부해서 뭐 하노? 살림하는 것만 배워서 시집이나 가면 되제.”

여자가 아는 것이 많으면 팔자가 드세진다는 어머니의 편견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남자가 무엇이고 여자는 또 무엇이란 말인가. 막연하게 내 머릿속엔 남자는 하늘 높이 올라가는 연처럼 그려졌다. 결혼하면 꼭 아들만 낳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어쩔 수 없지만 자식은 연처럼 넓은 하늘에 마음대로 날아다니게 하고 싶었다. 내 바람대로 아들만 둘을 낳았다. 세상 전부가 내 것이 된 것 같은 착각을 불러 일으켰다.

난 사업하는 사람이다. 아름대로 어려움이 있지만 그런대로 할 만하다. 어릴 때부터 남다 같은 삶을 살아 왔기에 잘 해내고 있지 않을까. 사업상 만나야 하는 사람과 술자리도 빈번하다. 때로는 이성을 다가오기도 하지만 공과 사를 구분지어 깔끔하게 정리한다. 상대가 무안하지 않게 감정 처리를 해 주는 것도 일하는 여자의 기본 능력이니까. 상대가 애절한 눈빛으로 다가올 때가 있다.

“저는 주민등록증에는 2자입니다만, 실제로는 1자입니다.”

너털웃음으로 위기를 넘긴다. 스스로 남자라고 최면을 걸면서 말이다. 오늘도 차가운 날씨지만 거래처에 남자를 만나러 간다. 어머니가 좋아하고 내가 그렇게 되고 싶어도 될 수 없었던 남자를 만나러 가고 있다. 이젠 남자가 부럽지 않다. 난 지금 여자의 몸으로 잘 살아가고 있다. 남자는 되지 못했지만 듬직한 아들 둘을 낳았다. 그리고 여자이기에 가능한 일은 그 남자를 지배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