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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2

[좋은수필]서리 맞은 무 / 권동진

서리 맞은 무 / 권동진

 

 

같은 부서 K양이 실연당했다. 7년간 교제하던 남자가 미국 유학을 떠나더니 한 해가 되기도 전에 소식을 끊었다. 변심했는가. 하루하루 애타게 기다리던 K양은 오랜 고민 끝에 마음과 달리 ‘헤어지자’며 문자를 보냈다. 소식을 끊었던 그 친구는 기다렸다는 듯이 ‘그러자’며 연락이 왔단다. 내심 사랑을 확인하고 싶었는데 이별의 통첩을 받는 초라한 꼴이 되어버렸다. 
이별은 가슴 아리고 슬픈 것이다. 생사를 가름하는 이별은 두말할 나위도 없고, 오랫동안 사귀던 연인과 헤어지는 실연의 아픔도 그에 못지않다. K양은 애써 웃음을 머금은 채 근무에 임하였다. 슬픔을 감추려는 마음과 달리 초췌해진 얼굴에 절절한 아픔이 배여 나온다. 이별은 도둑처럼 찾아오는 것을 뉘라서 쉽게 감당할 수 있을까. 무어라 위로해 주고 싶지만 아무 말도 해주지 못했다. 
점심 반찬으로 무생채가 나왔다. 철 이른 수확 탓인지 매운맛이 강하며 아리다. 무는 제철에 수확한 무가 단맛이 돌고 육질이 단단하다. 제철 무라 할지라도 수확 시기에 따라 맛과 영양에 차이가 난다. 맛이 가장 으뜸인 무라면 단연 서리 맞은 무를 꼽을 수 있다. 서리 맞은 무는 깊은 맛이 배고 육질이 야무지다. 무청도 뻣뻣한 성질을 삭혀 부드럽고 연해지며 영양가가 높다. 약용으로 사용하는 무는 두 번 서리 맞은 것을 고른다.
무는 11월 중순경에 수확한다. 가을걷이가 끝나고 겨울 기운이 서려오는 황량한 들판에 유난히 무, 배추밭만 푸르다. 농한기라 일손이 남아도 무 수확을 미루는 연유가 뭘까. 갑작스레 추위가 닥쳐 무가 얼기라도 한다면 어쩐단 말인가. 간밤 하얗게 서리 맞은 무나 배추밭을 보면 조바심이 났다. 자식을 대하듯 채소를 키운 농심이야 오죽하랴. 무가 냉해를 입어 숭숭 바람이 들면 농사를 접게 된다는 것쯤 모를 리가 없을 텐데도 농부는 맛과 영양을 위해서 찬 기운에 무 속살을 단련시키는 것을 마다치 않는다. 하얗게 서리를 맞추며 위험을 감수하는 농심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비록 채소라 할지라도 깊고 그윽한 맛이 스미려면 인고의 시간을 견뎌야 하나 보다.
만물의 영장인 인간도 질곡의 삶을 통하여 인격과 품위가 형성된다. 한 생명으로 태어나 육체적으로 변화해가는 과정이 성장이라면, 시련과 아픔을 견디고 마음이 강건해지는 것은 성숙이라고 할 수 있다. 채소나 과일이 비바람을 이기고 생육과 생장을 통해 열매를 맺고 여물어 가듯이 인생살이도 이와 별반 다르지 않다. 모진 세파를 이겨내야 더 성숙한 인간으로 거듭나는 것이리라.
이별은 가슴 저미도록 아프지만 새로운 만남의 기회가 된다. 실연의 아픔을 겪고 퇴직을 했던 K양이 어느 날 멋진 청년을 만나 결혼한다며 주례를 부탁해 왔다. 지난날 힘들었던 흔적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또 다른 인생의 출발점에서 신혼의 설렘으로 가득한 신부의 모습은 아름다움 그 자체였다. 뼈저리게 아픈 시간을 통해 더한층 성숙해진 그녀를 보니 덩달아 마음이 부풀어 올랐다. K양의 결혼을 진심으로 축복해주며 주례는 사양하였다. 경륜과 덕망으로 삶의 맛과 향기가 밴 훌륭한 주례자가 식을 집전하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주례사 대신 편지를 보냈다. 아무리 천생연분이라도 살다가 보면 우여곡절이 있기 마련이다. 어떤 시련이 오더라도 지혜롭게 극복해가는 여정 속에 인생의 참맛이 스며드는 것이라고 적었다.
나의 신혼 시절을 떠올려 본다. 숱한 갈등의 편린들이 쓴웃음을 짓게 한다. 사소한 일에도 일희일비하며 얼마나 민감하게 대립각을 세웠던가. 세월 탓인가. 이제 우리 부부는 웬만큼 시련이 닥쳐도 지레 겁먹지 않는다. 어지간한 일들은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매듭이 풀린다는 걸 오랜 경험으로 깨달았기 때문이다. 스스로 생각해도 숱한 고비를 넘기며 세파를 이겨 나온 듯도 하다. 하지만, 아직도 매운맛이 다 가시지 않았다. 인생을 달관한 듯 여유를 부리다가도 때로는 바늘 하나 꽂을 자리도 내어주지 못하는 속 좁은 못난이가 되곤 한다. 쉰을 지난 길목에 불어오는 바람이 스산하다. 추수가 끝난 황량한 들판 무 밭 같은 마음이다. 세월의 서리를 맞고 반백으로 변해버린 머리카락이 애달프다. 나는 얼마나 더 인생의 굽이를 돌아야 서리 맞은 무처럼 깊고 그윽한 단맛이 배여 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