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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2

[좋은수필]침묵 / 백승분

침묵 / 백승분 

 

 

할아버지 한 분이 불쾌한 얼굴로 버스에 오른다. 몸을 잘 가누지 못하는 걸 보니 약주를 한잔하신 모양이다. 손에는 검은 비닐봉지가 들려있다. 빈자리가 있는데도 앉지 않고 주정인 듯 푸념인 듯 혼자 큰소리로 떠든다. 한 아저씨가 부축하려고 하니 손을 뿌리친다. 넘어져 다치기라도 할까 봐 걱정스럽다.

   

힘들게 자식 키워놓아도 소용없다. 그나마 줄 재산이라도 있으면 모를까 나 같은 늙은이는 짐밖에 안 되니까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그래도 없는 살림에 어떻게 키워놓았는데. 큰 걸 바라는 것도 아니고 가끔 들려다봐 주고 김치찌개라도 같이 먹자는 거잖아. 저는 늙지 않을 건가. 젊은이들아, 그렇게 살지 마라. 부모 없이 태어난 자식 어디 있느냐. 못나도 부모는 부모다. 대충 이런 이야기다. 

 

누군가 나서서 그만 하시라고 말렸으면 좋겠는데 기사 아저씨도 승객들도 말이 없다. 침목 속에 불안한 마음이 풍선처럼 부푼다. 할아버지의 독무대에 갑자기 ‘퍽’ 뭔가 터지는 소리가 들린다. 할아버지가 손에 들고 있던 봉지를 바닥에 떨어뜨렸다. 봉지가 터져서 국물이 흐른다. 터진 봉지가 할아버지의 행동에 쉼표를 찍는다. 표정이 동상처럼 굳는다. 

 

사람들의 눈길이 바닥에 쏠린다. 저걸 어쩌나. 할아버지의 넋두리보다 더 난감하다. 소리 없이 점점 자리를 넓혀가는 반찬국물이 괴물 같다. 시큼한 냄새도 한 몫 한다. 허둥대며 가방을 뒤졌지만 오늘따라 그 흔한 비닐봉지나 휴지가 없다. 가방을 바꿔오는 바람에 필요한 것만 넣은 것이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니 맨 뒤쪽에서 연세 드신 아주머니가 봉지를 내민다. 얼른 받아 새 봉지를 덧씌우고 있으니 옆자리의 여학생이 다가와 휴지로 바닥을 닦고 내 손도 닦아준다. 그사이 앞에 있던 아저씨가 멍하니 서있는 할아버지를 자리에 앉힌다. 오랜 연습으로 손발이 척척 맞는 숙달된 배우들의 무언극을 보는 것 같다. 순식간에 정리되었다.  

 

할아버지께 봉지를 드리며 꼭 쥐고 계시라고 했더니 머쓱한 표정으로 어쩔 줄 모른다. 정신이 드는 모양이다. 늙은 사람이 주책 부려 미안하다며 손을 잡는다. 눈가에 물기가 어린다. 복잡한 감정을 다스리기 어려운 듯 고개를 들었다 숙였다 하며 묵묵히 앉아 계시더니, 두어 정류장 지나 내린다. 

 

어둠살이 낀 길을 비틀거리며 걸어간다. 버스에서 큰소리칠 때 미처 보지 못한 뒷모습이 왜소하다. 행여 놓칠세라 외로움과 초라함이 서둘러 따라간다. 할아버지는 지금 어떤 생각을 하실까. 술김에 내뱉은 말을 후회하며 자식들에 대한 원망이 조금 수그러들었을까. 찾아오지 않는 자식을 이해하며 마음을 다잡고 있지는 않을까.  

 

중심을 잡지 못하는 몸의 움직임이 더 부산해진다. 귀가를 기다리는 할머니 생각이라도 한 걸까. 어쩜 혼자 해결해야 하는 저녁이 급해진 것일까. 아니 까막딱따구리처럼 산 젊은 시절을 떠올리며 자신을 위로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버스 안은 조용하다 못해 숙연하다. 누구도 자식이나 부모 아닌 사람이 있으랴. 잊고 있던 부모를 떠올리고 그리운 자식을 생각하고 있는가. 이런저런 생각들이 버스 안을 서성인다. 침묵의 의미가 뻥튀기처럼 커진다. 벌어진 일을 어떤 눈으로 보느냐에 따라 결과는 판이하다. 잠시 숨을 고르고 역지사지가 되어 보면 보이지 않는 부분을 읽을 수 있다. 작은 깨달음이 자칫 소란스러워질 뻔한 분위기를 바꾸었다. 말보다 행동의 중요성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