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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2

[좋은수필]그리운 풍경 / 조명래

그리운 풍경 / 조명래

 

 

세상에는 서로 다른 불이 존재한다.

 

태초에 숲을 지나가는 바람에 의해 만들어진 자연의 불이 있는가 하면 남녀노소의 가슴속에서 소리 없이 타오르는 마음의 불이 그것이다. 원시 인류들이 음식을 익혀 먹으면서 사용하기 시작한 불은 여러 천 년의 세월을 거치는 동안 우주선의 불이 되고 원자로의 불이 되고 디지털 화면의 불로 변했으나, 마음의 불은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고 활력과 창조의 원천이 되는가 하면 유년의 터에 자리하여 평생의 그리움이 되기도 한다. 숲에서 우연히 발견된 불이나 사람의 심장을 뛰게 하는 뜨거운 불은 다 같이 발전과 성장의 근원이었음에 불을 다루는 기술이야말로 여전히 미래 사회를 변화시키고 이끌어 가는 요인이 될 것이다. 인간의 역사를 불이 만들고 있다.

 

불은 한 폭의 그림이다.

 

나지막한 감나무 가지에 걸린 그믐달이 무서리 뽀얗게 내린 마당을 비추고 있다. 부지런한 새벽 까치가 떨어뜨리고 간 깃털 한 닢이 미풍에 날리고 있는 시각이다. 마구간에는 잠에서 갓 깨어난 소가 잊었던 되새김질을 하며 내다보고 있다. 엄마는 부엌에서 가족의 아침밥을 짓고 아버지는 사랑방 아궁이에 불을 지펴 쇠죽을 끓이신다. 볏짚이나 왕겨 따위는 아니지만 싸리나무, 아카시아 같은 막대기 땔감은 안방 부엌이나 사랑채 아궁이에 걸린 솥을 달구고 난 후에도 소임이 또 있다. 불덩이들이 재로 사그라지기 전에 부지깽이로 골라내어 엄마는 다리미에 담고 아버지는 화로에 담는다. 남은 불덩이에 물을 부으면 김을 뿜으며 식어서 마침내 숯이 된다. 하나라도 헛되이 버리지 않으려는 지혜의 그림이다.

 

해가 돋기엔 아직도 이른 시각이다.

 

화로를 든 아버지께서 안방으로 들어오신다. 한참이나 재를 다독거린 다음 돋보기를 끼고 간밤 호롱불 아래서 읽다 만 언문 소설책을 펼치신다. 형편없는 지질에 띄어쓰기도 하지 않았을 뿐더러 그림 하나 없는 책을 무슨 재미로 읽는지 알 수가 없었다. 알맞게 따스해진 화로 옆으로 아버지의 책 읽는 소리가 구수한 노래로 흐른다. 엄마가 먼저 방 안으로 들여오는 것은 빨아서 말린 옷가지들이다. 아까부터 지푸라기 위에나 땔감 더미 위를 막론하고 마당 가득 펼쳐 두었던 옷가지들을 내려놓고 다시 불덩이가 담긴 다리미를 내려놓는다. 엄마의 옷가지들은 알맞게 젖어 있었다. 각각의 불덩이를 가진 아버지와 엄마는 무언의 눈길을 주고받는다. 부부간의 정이 화롯불처럼 은은하기도 하고 다리미 바닥처럼 뜨겁게 오고 가는가 보다. 화로를 달구고 다리미를 달군 불씨가 아버지 엄마의 가슴에서 꺼지지 않고 있다. 어린 내 가슴에까지 번져 온 온기는 지금도 이른 봄 뒷동산에 피어나는 할미꽃 꽃자줏빛으로 남아 있다.

 

자루 달린 다리미가 있었다.

 

다림질을 도와 드린 경험이 여러 차례 있어 바지나 남방과 같은 남정네들의 옷가지뿐 아니라 여인네들의 치마 적삼에 이르기까지 그 모양새에 따라 잡아야 하는 곳을 안다. 나는 두 손으로 옷자락을 잡고, 엄마는 옷자락의 한쪽을 오른발로 밟고 왼손으로 다른 한쪽을 잡고 마주 당기면 다림질할 면이 펴진다. 오른손으로 다리미를 잡은 엄마는 불덩이가 쏟아질세라 조심스레 다림질을 한다. 쭈글쭈글하던 옷가지들이 다림질 한 번에 깨끗하게 펴진다. 들일로 피곤에 젖은 엄마의 얼굴이 아침이면 웃는 얼굴로 피어나듯이 빨래들이 환하게 펴진다. 내가 보태는 미력도 엄마에게는 큰 기쁨인가 보다.

 

결코 겉으로 표현하지 않는 가르침.

 

늦은 오후 놀다가 돌아오면 컴컴한 안방을 화로가 지키고 있다. 부젓가락으로 재 속을 헤집으면 불씨가 드러나며 언 손을 녹여 준다. 재 속에 꼭꼭 묻어 두어야 불씨가 꺼지지 않는 것이니 질화로의 불씨가 하루 종일을 가고 어떤 때는 그다음 날까지 가는 비결을 그때사 깨달았다. 아버지는 화로의 재 속에 불덩이를 숨겨 두는 당신의 뜻이 겉으로 드러날까 두려운지 그저 보일 듯 말 듯한 표정으로 재를 다독거리고 있을 뿐이다. 언제나 무심한 표정을 하셨지만 마음이 새어 나오는 것까지는 어찌할 수가 없었으리라. 요즘도 골목길 포장마차에서 군밤 익는 냄새를 맡으면 오래 잊혀졌던 아버지의 교훈이 가슴을 울렁이게 한다. 질화로같이 투박한 모습이지만 그 시절 구수한 맛이 생각나 군침을 삼킨다.

 

요술의 손을 가진 이 세상의 단 한 사람.

 

생콩이 콩나물도 되고, 보리싹 난 엿기름이 단술도 된다. 밀가루가 국수로 변하는가 하면 어디에 두었는지 도무지 찾을 수가 없었던 물건도 기다렸다는 듯이 찾아진다. 엄마는 그날도 냉수를 입에 물고 안개처럼 뿜어 가며 다림질을 하셨다. 비록 가난으로 남루해진 무명옷도 풀 먹여 다리기만 하면 상큼한 풀 내음이 나는 새 옷이 된다. 다리미 안에 간직한 불씨로 신비한 마술을 부리는 엄마의 손을 나는 안다. 따스했던 엄마의 손은 장성한 아들에게는 식지 않는 뜨거움이다

 

문명의 불은 많은 것을 사라지게 했다.

 

엄마의 손에 들려 옷을 펴 주던 다리미나 아버지의 겨울을 따스하게 해 주던 화로가 사라진 지 오래다. 전열기들에 의해 아궁이며 땔감이 밀려나고 트랙터 엔진 소리와 함께 밭 갈던 누렁 소도 어디론가 가고 없다. 세상에 넘치는 것은 온통 컬러로 화려한 문명의 불, 번갯불같이 왔다 가는 찰나적인 불이다. 변화무상한 불이 인간의 미래를 편리하게 바꿔 줄 수는 있을 것이나 질화로 식어 버린 재 속에 묻혀 있던 아버지의 마음 같지는 않으리라. 때로는 그것이 순간적인 쾌락과 진한 흥분을 가져다줄 수도 있겠지만 옷가지의 주름살을 펴 주던 엄마의 따스함을 대신할 수는 없으리라. 아버지와 엄마를 이 땅에서 다시 만날 수도 없고 내가 다시 철부지 소년으로 돌아갈 수 없는 현실이고 보니 오히려 미지근한 사랑이 아쉽다. 마음의 주름살을 펴 주는 숯불 같은 풍경이 너무나 그립다. 산에 들에 타올랐던 자연의 불이 내 유년 부엌 아궁이의 불로 변하고, 안방에서 할미꽃으로 피더니 결국은 반백의 내 가슴에 그리운 풍경으로 남아 변치 않고 있다. 세상에는 변하는 불이 있는가 하면 영원히 불변하는 불도 있음을 알았다 

 

유년의 화폭에  

불꽃 하나 타오르고 있네. 

아궁이에 지핀 땔감이  

밥을 하고 쇠죽을 끓이고, 그래도 남은 불씨는 

아버지의 화로와

엄마의 다리미에 담기더니. 

불은 이제  

꽃자줏빛으로 살아 있는  

그리움 

그리운 풍경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