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엽이 하는 말 / 권중대
“Me today, you tomorrow.”
어깨를 툭 치며 떨어지는 플라타너스 낙엽지는 소리가 시인(詩人)에게는 이렇게 들렸다고 했다.
가슴 설레던 신입생 시절에 말로만 듣던 유명한 시인이 우리 학교에 교양강의를 왔었다. 날아 갈 듯한 빵모자를 머리에 얹은 시인이 창경원 옆길을 걸으면서 느낀 것이라고 하면서 전하는 강의 내용은 매우 감동적이었다. 낙엽을 빼놓고 가을을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듯이, 우리의 인생도 머리에 하얀 물이 들기 시작하는 가을쯤이 돼서야 말하는 것이 제격이 아닌가 싶다.
낙엽의 색깔하며 싸하게 얼굴을 스치는 바람소리가 그때 그 시인이 말하던 가을은 아마 지금쯤이었던 것 같다. 가을과 낭만을 연관시키는 것은 사치라는 생각을 하면서, 나는 지금 그 시인이 걸었음직한 낙엽 지는 거리를 우울한 기분으로 걸어가고 있다. 오랫동안 간(肝)과 씨름을 하던 친구의 빈소에 다녀오는 길이기 때문이다.
그는 처음부터 자기가 앓고 있는 병이 암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어려운 가정에 태어나서 오늘을 일군 뚝심을 다시 한 번 발휘하여 암을 이겨 보겠다는 그의 결연한 마음에, 암에 걸리면 다 죽는 것은 아니다, 심장병, 중풍, 멀쩡한 사람의 목숨을 순식간에 앗아 가는 교통사고 등 암보다 무서운 것들은 얼마든지 있다는 내 이야기가 퍽 힘이 된다고 그 친구는 말하곤 했었다.
자주 가 보지는 못해도 종종 전화를 할라치면 “많이 좋아졌어”라고 말했지만, 그 목소리는 점점 힘이 없어지는 것을 느끼면서 사태를 예견하기는 했었다. 대형 사고가 났을 때처럼 한 번에 많은 사람을 데려가면 아우성 소리가 크기 때문에, 하늘은 하나씩 하나씩 나누어서 데려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언젠가, 친구들이 별미(別味)가 있으니 식사나 하러 가자고 한 일이 있었다. 제법 한적한 시골에 도착하니 주인이 반갑게 맞았다. 조금 후에 꿩과 토끼가 여러 마리 가두어진 철망 앞으로 안내를 하더니, 주인은 친구에게 공기총을 건네주었다. 친구는 만면에 웃음을 띠면서 많이 해 본 듯한 솜씨로 연달아 방아쇠를 당김과 동시에 아름다운 깃털을 가진 꿩 두 마리가 공중으로 솟구치다가 떨어졌다. 다른 꿩들은 놀라서 요란한 소리를 지르며 한쪽으로 몰리더니 얼마 안 가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유유히 먹을 것을 찾고 있었다. 그들은 그들의 생명을 보호할 아무런 대책도 없이 모든 것을 하루의 운수에 맡긴 채 하나씩 죽어 갈 뿐이었다.
사람도 이들과 별반 다를 것이 없다. 누군가 순서가 되어 부음(訃音)이 전해 오면 빈소에 가서 고인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고 얄팍한 봉투 하나를 건네는 것이 남은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의 전부가 아닌가. 처음에는 슬프기도 하고 인생의 허무함을 한탄해 보기도 하지만 꿩들이 소리를 지르면서 한쪽으로 쏠리다가 이내 평상으로 돌아가서 먹이를 찾는 것처럼, 사람도 나름대로의 삶으로 돌아가기 마련이다.
“한 번 가더니 안 와.”
“보고파서 죽것어.”
“매정한 것이 목심여.”
“죽은 영감이 들으면 서운허것지만, 그때는 이렇게 안 서운혔어.”
혼자되어 고생스러운 삶을 살면서도 남겨 놓고 간 아들 키우는 재미로 살다가, 그 아들마저 떠나 보낸 어느 노파의 오래 전 푸념이 남의 일 같지 않게 지금도 내 가슴에 묻어 있다. 죽음이 크나큰 슬픔인 것은 이렇게 한 번 가면 다시 오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가을이 쓸쓸한 것도 떠나는 모습이 수도 없이 많이 보이기 때문이 아닐는지……. 떨어진 낙엽들이 다시는 못 올 곳으로 쓸려 가고 있듯이, 가로수 밑을 걸어가는 나 역시 집으로 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향해서 한걸음 한걸음 가고 있는 것이나 다를 바가 없지 않은가.
곱게 물들어 가는 저녁노을을 배경으로 이 세상이 괴로워서 검은 테 두른 액자 속으로 훌쩍 뛰어들어가 버린 친구가 웃으며 말하고 있었다.
“Me today, you tomorr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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