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부하 / 최중수
커피포트에 물을 끓이는데 ‘픽’ 하고 전기가 멈춰 선다. 물방울이 튀어 합선이 된 줄 알았다. 또 실수를 했다며 혀를 찼다. 이런 일을 두 번이나 겪었다. 전기에는 까막눈이라 겁이 나서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만사가 그렇지만 각종 기기에 재능이 있는 꾼들은 만나는 제품마다 장난감 다루듯이 척척 풀고 묶는다. 하지만 모든 가전제품의 작동에 아둔한 나는 고장이라도 낼까 봐 자꾸만 꽁무니를 뺀다. 그러다가 아내로부터 안 들어도 될 쓴소리까지 듣게 된다.
세 번 만에 과부하가 떠올랐다. 물의 양을 약간 줄이니 전기가 끊기지 않고 잘 끓었다. 아내에게 보고했다간 본전도 못찾고 핀잔만 들을 게 뻔하다. 그래서 머리통을 툭툭 쳐가며 혼자 웃고 말았다. 이런 일은 심심찮게 일어난다. 그만큼 세상 물정이나 일상사에 둔감하다는 뜻이다. 하나라도 제대로 하는 게 있는지 모르겠다.
호롱불 밑에서 살아온 지가 불과 반백 년 전이다. 하지만 이젠 한시도 전기 없이는 못 사는 세상으로 변했다. 전기란 물건은 편리하게 쓰이면서도 조금만 긴장을 풀면 안면을 바꾸는 마귀로 변하고 만다. 그래서 사용에 대한 안전수칙을 입에 달고 산다.
수많은 전자제품은 과부하를 막기 위한 안전장치가 빠지지 않는다. 그래도 고마운 줄 모르고 무심하게 쓰기만 한다. 만인이 함께 누릴 수 있는 문명의 혜택, 이 모든 호사도 안전수칙을 지킬 때만 가능해진다. 약간만 방심해도 엄청난 대가를 치러야 한다.
전기와 함께 편리한 생활을 누리면서도 호피(虎皮)로 재단된 옷을 걸치고 사는 것처럼 늘 긴장하고 불안하다.
왜 인체에는 과부하를 막아주는 장치가 없을까. 전력을 규정량대로 쓰라는 시스템과 비슷한 장치가 사람의 몸에도 있었으면 좋겠다.
이는 태초에 인간을 만들어 준 조물주의 몫이다. 잠시 한눈을 팔다가 실수를 했을까. 아니면 과부하를 막아주는 시스템대신 온갖 슬기와 뛰어난 지능을 부여해 만물의 영장으로 살아가게 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지구촌의 주인으로 생명 있는 모든 것들을 지배하며 아음대로 다루나 보다.
힘에 부치는 일을 하다가 귀한 생명을 내놓는 사람이 있다. 과로사는 참으로 불행한 일이다. ‘기왕이면 편하게 지내다가 죽는 게 낫지.’ 이렇게 중얼거린다. 가치 있는 일을 하다가 눈을 감으면 행복할 거라 믿는다. 귀한 몸값을 톡톡히 해내다가 간 위인은 두고두고 추앙을 받기 때문이다.
창조주가 과부하를 막기 위한 안전장치만 마련해 두었어도 과로사쯤은 피할 수 있다. 피로가 누적되어 생명에 위협이 느껴지는 어느 순간, 지친 몸에서 ‘삑삑’ 하고 경보음이 울려온다. 이런 소리를 듣고도 일손을 놓지 않는 배짱은 없을 것이다. 하던 일을 접어둔 채 휴식을 취하면 과부하를 벗어난 전기제품처럼 금세 원기가 회복돼 위기를 넘길 수 있다. 일사병으로 쓰러졌다가 시원한 그늘에서 기운을 차릴 때와 흡사하지 싶다.
일벌레라는 달갑잖은 찬사를 들을 때쯤이면 문제가 있는 계기를 점검하듯 가끔은 건강 체크를 해보는 것도 좋다. 조물주가 인체에 과부하를 막는 센서를 생략했다면 특별히 생각해 준 좋은 두뇌로 알아서 하라는 뜻일 수도 있다.
식음도 적정량을 넘기다가 과식을 하게 되면 뱃속에서 ‘삐리리’하고 물러앉게 하는 경고음이 들려올 수 있다. 체내의 오장육부도 과부하를 막기 위한 시스템에 의해 움직일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이제 와서 선잠 깬 노친처럼 엉뚱한 안전장치를 욕심내다니 가관이다. 조물주로부터 부여받은 슬기로 과부하 장치가 없어도 잘 살아가고 있어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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