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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2

[좋은수필]첫사랑을 말하지 말자 / 김상립

첫사랑을 말하지 말자 / 김상립

 

 

첫사랑이란 말의 뜻이 과연 시간적으로 따져 그 사람이 맨 처음 해 본 사랑일까?    

요즈음 젊은 세대는 많이 다를 것으로 알고 있지만, 내 나이의 사람들은 성장하면서 첫사랑에 대한 얘기를 꽤 자주 묻고 대답하며 살았었다. 당시의 내 친구들은 첫사랑에 대해 막연한 환상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얘기를 들어 보면 제가 나눈 첫사랑은 이 세상에서 가장 순결하고 가장 아름다운 사랑이라 믿고 있었고, 반면에 첫사랑과의 이별은 하나같이 제 마음과는 달리 불가항력적인 요인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일어났었다고 변명하기 바빴다. 그러면서도 새로운 사랑이 시작되면 지난 사랑은 까마득하게 잊어버리고 아예 말조차 꺼내지도 않았다.    

내가 초등하교 3학년 때, 담임선생님은 여선생님이었다. 마침 내가 반장을 맡고 있었던 터라 선생님과는 접촉이 잦았다. 간혹 선생님 집에서 같이 밥을 먹을 때도 있었고 잔 심부름도 자주하게 되었다. 선생님이 하얗고 통통한 손으로 나를 쓰다듬거나 등을 두드려 주면 종일 기분이 좋았고, 치마폭에서 풍겨오는 바닐라 향 같은 냄새가 너무 좋아서 코를 킁킁거리며 다가가기도 했다. 선생님 때문에 학교에 가는 것이 신이 났고, 집에 오기 싫어 선생님 주위를 맴 돌았다.

그러나 꿈 같은 시간은 화살처럼 날아 어느새 학년이 끝나고 말았다. 그리고는 이별이었다. 생각하면 당시로서는 순애보 같은 나만의 사랑이었지만, 지금 내 마음 속에 남아 있는 것은 꿰어도 한 줄로 이어지지도 않을 낡은 기억의 조각 몇 개뿐이다. 이런 감정도 첫사랑이라 말 할 수 있을까?    

또 내 사춘기의 사랑도 분명하게 잡히지 않기는 마찬 가지다.

2에서 시작하여 대학 1학년에서 끝나버린 사랑은 내 청춘에서 가장 치열하게 노력을 쏟았던 사랑이 될 터이다. 입술이 데도록 뜨겁게 사랑했던 정열적인 추억들이 아직도 적지 않게 남아 있건만, 정작 그녀에 대한 기억은 왜 흐릿한지 알 수가 없다. 이별이 석연치 않았던 이유 때문인지는 몰라도 내 학창시절을 온통 가슴 뛰는 그리움으로 도배하게 한, 그 사람의 모습은 제대로 떠 오르지 않고 보이는 것은 황혼에 선 늙은 내 모습뿐이다. 그러면 이런 경우가 진짜 첫사랑인가

그 후로도 나는 몇 명의 여인들과 특별한 인연을 가졌었다. 그런데 그 중 누구와 가장 깊은 사랑을 나눈 것 같으냐고 물으면 분명하게 대답하기가 어렵다. 도대체 사랑을 조금하거나 많이 하는 게 가능한 일이기나 한 것일까? 비록 사람에 따라 사랑하는 방식이 나 내용이 조금씩 다를 수는 있어도, 사랑하는 순간만은 정직하고 진실한 마음이었을 것이라는 게 나의 믿음이다.

사랑은 그냥 움직이는 마음이요, 몸이다. 울어나는 감정 따라 꿈길처럼 따라 가는 것일 뿐. 못 견디게 보채는 마음이요, 못 말리는 심장의 솟구침이다. 그래서 제 마음대로 할 수가 없고 제 뜻대로 되지 않으니 안타깝고 몸살이 나는 것이다. 필요에 따라 감정 조절이 가능한 사랑이라면 그건 진정한 사랑이 아니리라. 그러니 사람을 바꾸어가며 몇 차례 사랑을 했더라도 매번 절실할 수 밖에.   

또 이별을 떠올려 보자. 누가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을 원하겠는가?

그러나 이별은 늘 일어나고 있고, 이별로 말미암은 아픔도 함께 생기고 있다. 거짓 사랑이 아니라면 누가 이별을 치밀한 계획하에 결행하겠는가! 사랑을 교묘하게 악용하는 범죄적 수준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이별이란 마음의 변덕이요 마음에 탈이 생긴 것이다. 뚜렷하게 꼬집어 말 할 수는 없어도 그냥 마음이 그 사람에게서 떠나는 현상이다. 사랑했던 마음의 깊이나 시간의 장단(長短)에 관계없이 피치 못하게 헤어짐이 일어나고 마는 것이다.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별이 가능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일은 타당하지 않다.    

사랑이 우연을 가장하고 얼굴을 내미는 것처럼, 이별도 예고하지 않고 그렇게 찾아 오는 가슴 아픈 사건일 뿐이다. 그러므로 만일 사랑이 그대 앞에 다가오거든 그 어떤 경우라도 마음을 다하여 사랑해야 할 것이다. 진정을 다 바쳐 사랑하다 헤어진 아픔보다는 성심껏 마음을 주지 못한 사랑에 대한 후회가 더 클 것이기 때문이다.        

흐르는 시간과 함께 닳아 없어져 기억마저도 희미한 사랑을 두고, 처음 경험했다는 이유만으로 첫사랑이라 부를 수 있겠는가? 또 몇 번에 걸친 사랑의 행위가 있었다 하여 첫사랑은 어떻고, 둘째는, 또 셋째 사랑은 이랬다고 순서대로 구분하여 그 깊이를 말할 수 있겠는가. 여기서 나는 첫사랑이란 없다. 다만 사람들이 얘깃거리를 만들기 위해 일부러 그렇게 이름을 붙인 것일 뿐이다 라고 항변하고 싶다. 하지만 일생에 딱 한 번뿐인 놀라운 사랑이 없다는 얘기는 아니다.

누구에게나 눈을 감는 순간까지 제 마음 속에 가장 강렬하게 남아있어, 그 이상의 진실된 사랑은 평생에 다시는 만나보지 못했다고 절실하게 느낄 때 비로소 첫사랑이라 부르는 게 옳지 않겠느냐는 뜻이다. 첫사랑이란 몸과 마음, 그리고 영혼도 함께 움직일 때 일어나는 일생일대의 큰 사건이다. 하여 첫사랑은 언제까지나 그대 가슴 속에 살아서 그대가 먼 길 떠날 때 비로소 함께 사라지게 될 것이니 그 누구도 첫사랑을 함부로 묻지도 말고 쉽게 대답하지도 말자.  

이렇게 보면 나 역시 아직 첫사랑을 못해봤을 수도 있겠고, 이미 가슴 속에 자리잡고 있는 사랑이지만 마지막까지 안고 갈 사랑인줄을 미쳐 모르고 있을 수도 있겠다. 개개인에게 주어진 인생 여정에 따라 첫사랑이 일찍 찾아 올 수도 있을 것이고 아주 늦게 만나기도 할 터이라서 하는 말이다. 맨 처음의 사랑으로 동반자가 되어 한 평생 변하지 않고 살았다면 그보다 더한 행복은 없을 것이지만, 설령 몇 번의 쓰라린 이별이 있었다 하더라도 그 중에서 제 마음을 온통 차지한 체 잊혀지지 않고 뜨겁게 머물러 있는 사랑 하나 있다면 그것 또한 행복한 일일 터이다.

만일 당신이 아직 분명하게 첫사랑을 느끼지 못했다면 나는 끝까지 포기하지 말 것을 당부 드리고 싶다. 정확하게 언제라고 말 해 줄 수는 없어도 그대 일생에서 만나야 할 운명적인 단 한 번의 사랑은 반드시 찾아 올 것이고, 그게 바로 첫사랑으로 남을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