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표 운동화 / 유영자
화려한 등산복을 차려입은 중년 부인들이 이동 카페 앞에서 길게 줄을 서 있었다. 한 잔의 따끈한 커피를 마시기 위해 나도 그 줄에 끼어 오륙도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 여자가 내 운동화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그 운동화 김연아 신발이죠. 얼마 주셨어요?”
김연아 신발이라고? 듣도 보도 못한 뜬금없는 물음에 나는 머뭇거리다가 엉뚱한 대답을 하고 말았다.
“글쎄요. 선물 받은 거라서…. 잘 모르겠는데요.”
그 순간 왜 그런 대답을 했을까. 화려한 등산복 차림의 여자들에게 기죽고 싶지 않다는 유치한 감정이 나도 모르게 그런 거짓말로 나타난 게다. 집에 돌아와서 혼자 킥킥거렸다.
산책을 다녀오던 길. 전혀 계획에 없던 일이었다. 신발장수는 대로 옆 인도에 운동화를 죽 늘어놓고 있었다. 생각 없이 구경하고 있었다. 운동화 한 켤레가 내 눈에 들어왔다. 손에 들고 들여다보았다. 꽤 단단해보였다. 가벼웠다. 모양이나 색깔도 나무랄 데가 없었다. 뒤집에 보았다. 밑창도 튼튼했다. 신발장수 아저씨는 그런 나를 보더니,
“그게 요새 잘 팔리는 물건입니다. 이쪽 것과 비교해서 비싸기는 하지만, 그 물건이 더 잘 나가요.”
그때까지도 살 생각이 없었다. 아저씨 말을 듣고 보니 운동화가 더 괜찮아 보였다. 값을 물어보았다. 내가 신은 운동화는 그 몇 배를 주고 산 것이다. 신발 하나는 좋은 걸 신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발이 편해야 많이 걸어도 피곤하지 않다. 내 운동화는 이제 밑창이 닳아서 빗물이 샌다. 하지만 가죽으로 된 겉은 멀쩡하다. 뒤축이 다 닳아서 삐딱한데도 껍데기는 멀쩡하니 그냥 신고 다닌다. 정도 들었다. 버려야지 하면서도 또 신게 된다. 호주머니에서 돈을 꺼내본다. 운동화 살 돈은 넉넉하다. 그래, 신발장수 아저씨 기분 좋게 한 켤레 사자. 신발장수 아저씨를 핑계로 내 호주머니 사정을 봐주기로 했다. 새 신을 샀으니 헌 신은 버려야 한다. 물건을, 그것도 고물로 쌓아두는 건 성미에 맞지 않다. 미련도 없이 쓰레기통에 던져 넣어버렸다.
얼마를 가다보니 운동화 가게가 있었다. 내 눈에 들어온 운동화가 진열장에 있었다. 내가 신은 운동화랑 똑 같았다. 가격을 훔쳐보았다. 자그마치 내가 산 운동화 가격의 10배에 해당하는 값이었다. 내 운동화를 내려다보았다. 어디가 다른 걸까. 모양, 색깔, 착용감, 모를 일이었다. 신고 다니는 동안 발이 편해서 메이커신발에 못지않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발견했다. 그 운동화와 내 운동화의 차이점을. 바로 운동화 옆구리에 보일 듯 말 듯 새겨진 마크였다. 둥글게 새겨진 그 마크가 내 운동화에서는 거꾸로 되어 있었다. 나는 마치 물구나무를 선 기분이었다.
어느 날 현관 청소를 하다가 공연히 내 운동화를 들고 마크를 들여다보았다. 들여다보면 볼수록 이상하게도 사람의 모습이었다. 사람은 바닥에 온몸을 웅크린 채 울고 있는 듯 혹은 고민하는 듯했다. 운동화를 보는 내 생각이 비뚤어져 있었다.
삼십여 년 전, 결혼하여 부산에 내려왔을 때는 동네에 신발 공장이 참 많았다. 거의가 운동화 공장이었다. 왕성하던 신발 산업이 무너지기 시작한 건 1990년대 직원들의 임금이 오르면서 외국 유명 브랜드의 하청이 다른 나라로 옮겨지고부터였다고 한다. 신발공장들이 하나 둘 사라지기 시작했다. 세계적인 수준을 자랑하던 부산의 신발산업이 사양길로 접어든 것이다.
내 운동화에 새겨진 땅에 엎드린 듯한 신발의 무늬는 숱하게 문을 닫고 물러선 신발공장의 사장들을 생각나게 한다. 그들은 어디에선가 이렇게 웅크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거꾸로 새겨진 마크의 신발을 만들어 내고 있을 거라는 생각, 재기의 몸부림을 하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때는 무역산업에 한몫을 단단히 한 그들이, 지금은 살아 있다 해도 영세기업의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을 것은 뻔하다.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세계적인 기술을 지니고 있지만, 그들이 만든 물건은 번듯한 점포에 진열할 수가 없다. 그들이 선택한 길은 메이커가 내는 가격의 십분의 일 밖에 되지 않는 값으로 리어카 장수 아저씨에 의존하고 있을 것이다. 나는 갑자기 얼굴이 붉어졌다.
길표 운동화를 신고 누가 물으면 당당하게 대답해야겠다. 오늘도 골목 귀퉁이에는 길표 운동화를 파는 리어카 장수 아저씨가 한겨울 추위에 손을 비비고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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