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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3

[좋은수필]기도 / 윤보식

기도윤보식

 

 

창밖에는 발그레 물든 벚꽃망울을 봉긋하게 밀어 올린다. 우듬지 부근의 곁가지와 어린 가지들은 날이 갈수록 혼인색으로 물이 오른다. 부푼 가슴은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마음을 놓아 버린다. 다섯 나래가 펼쳐진다. 햇살이 꽃잎 위에 하얗게 부서진다. 벌들은 봄을 유영하며 꽃 속을 파고든다. 배추흰나비 한 마리가 흰 꽃과 하나 되어 날갯짓을 멈춘다. - 까닥까닥 까아닥 출렁.- 봄잠으로 빠졌던 그는 어느 새 꽃잎이 된다.

그리도 추웠던 겨울을 두툼한 배짱으로 밀어냈다. 청춘의 고운 꿈을 교직에 묻었던 이들이 전국에서 모였다. 세월은 이마를 지나간 모양이다. 주름살은 계급장이다. 인고의 흔적이다. 교직의 꽃은 경륜이 다는 것인가.

사방은 쥐 죽은 듯이 조용하다. 사각사각 연필심 닳는 소리만 들린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교육, 공부 자체를 즐기는 교육이란 주제로 강사의 심도 있는 강의는 이어지고 있다. 느릿한 목소리에 조용한 강의가 수강생들에게 평안을 준다. 고요한 강의실 분위기는 일정한 너울을 일으키며 강의실 뒤편으로 흐른다. 뒤편 요소요소에 바른 자세를 하고 선 학습도우미는 개방적인 질문과 개별학습을 위하여 스탠바이(stand-by) 중이다. 수강생을 존중하는 마음으로 공수(拱手)자세로 앞을 바라본다. 뒷벽에 닿은 너울이 앞으로 되돌아가다 앞에서 달려오는 흐름과 만나서 공명이 되어 더욱 고요를 파고든다.

이따금씩 강사의 조크가 이어진다.

눈을 감고 기도하시는 분은 내일 평가를 위한 것이지요?”

.”

속뜻을 알아차린 사람이 갑자기 한 바탕 웃어젖힌다. 기도를 하던 그룹은 웃음소리에 놀라 실없는 미소를 던지고는 본연의 자세로 돌아간다. 형광등에는 불이 늦게 들어오는 법이지. 아주 멀어 보이는 강단에는 나른한 충만감이 빈터를 채운다.

마음을 다잡고 이 나라의 교육을 바로 세우기 위해서는 나의 소양을 길러야 한다. 강의록과 강사에게 번갈아 눈길을 던지며 집중에 집중을 거듭한다. 정장 속에 졸라맨 넥타이가 연수원 분위기를 무게를 잡아간다. 긍정적인 메시지에 앞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맞아, 옳은 말씀이지.’ 국가의 미래를 위하여 정성껏 기도를 올린다. 연필도 바른 자세로 힘주어 잡는다.

곧추 세운 허리가 어느새 앞으로 굽어진다. 국가와 미래를 위한 기도인가. 연필은 유체이탈 되어 탁자를 구른다. 흐트러진 자세를 바로 잡는다. 다시 손을 벗어난 볼펜은 탁자에서 바닥으로 떨어져 행방을 숨긴다. 눈꺼풀은 다시 지그시 세상을 누른다. 이 무게는 천하장사도 못 막는다. 덜 떨어진 눈으로 주위를 한 번 둘러본다. 나를 주시하는 이는 없다. 유리창에 고향집에서 어머니께서 기도하는 모습이 얼비친다.

저녁 설거지를 끝내고, 건넌방 뒷문 앞에 차려 놓은 베틀에 올라앉는다. 별을 보니 유시를 넘어서 술시쯤이다. 낮에는 들일을 마치고, 이 밤에는 길쌈하신다.

철거덕 척, 철거덕 척-’

겨우내 날아서 도투마리에 감아 놓았던 삼베감을 베틀에다 메우셨다. 줄이 달린 발을 당겨 벌어진 입으로 오른 쪽에서 북을 밀어 씨줄을 넣는다. 바디를 힘껏 당긴다. 발을 놓으면 반대로 벌어지는 입에다 왼손으로 북을 밀어 넣고 바디를 힘껏 당긴다. 그렇게 엄마는 밤새워 세월을 짜신다. 새끼는 호롱불 옆에서 책을 읽는다.

철거덕 척, 철거덕 처억, 처억 억. 학이시습지면, 학이시 습 지 면-’

꾸벅, 꾸벅 휘익, 건들건들 찌직-’

엄마는 오늘도 6남매 장래를 위해, 우리 가족의 안녕을 위해 기도를 하시나 보다. 어매의 얇고 거칠어진 손등을 바라보며 나도 기도한다.

어매, 내려와 주무시지요.”

야야, 하루 석 자씩은 더 짜야 모레 서는 읍내 장에다 내다 팔아, 너 형 월사금 낼 거 아이가. 몇 필은 더 짜야 앞 밭 옆, 논 값에 쪼매라도 보태 제. 잘 새가 있나?”

지는 고마 잘랍니더.”

그래, 어여 자야 낼 학방에 늦지 않제. 어여 자거라.”

철거덕 척 철거덕 처억 처 억 척.’

사랑방에서는 짚을 비비는 소리가 한참을 이어졌다 끊어진다. 아부지께서 새끼를 꼬는 중이다.

스륵스륵 스르르 스륵 스륵 스르르 쑤욱.’

담배 연기도 방 안에서 느릿느릿 꼬깃꼬깃 창호지 문틈을 삐어져 나와 밤이 내린 어둠 속으로 빠져 든다.

아부지. 안 주무십니꺼?”

우물가에 가서 물 한 대접 뜨다 주고, 그려 머이 자거라.”

스륵스륵 스르르……

아버지는 올 농사가 잘 되게 해 달라고 손으로 정성껏 빌면서 치성을 드리시나 보다. 손으로 비는 소리는 이따금씩 흘러나오고, 코고는 소리를 곁들여 기도를 올리신다. 끄덕끄덕 끄어 덕 움찔.

베 짜는 소리는 서쪽하늘을 나르고, 아버지의 새끼 꼬는 소리는 동쪽하늘의 삼태성을 향한다. 낭랑하게 책 읽는 소리는 북극성을 향한다. 고요한 밤하늘에는 또 하나의 행복의 베를 짠다.

히야, 안 자나?”

그래. 니 먼저 자거라. 난 내일 중간고사 마지막 날이다. 두 과목만 공부하면 된다.”

쓱쓱 똑똑 또르르 찌찌직……

우리 형은 내일 만점을 받기 위해서 기도를 올리나 보다, 고소한 냄새까지 풍겨가면서 기도를 올리나 보다.

야야, 이 이야기 마자 해 줄게. 엊저녁에 하던 거, 말이다.”

할매요, 나도 다 아니 더. 성진이가 팔선녀하고 놀았는데 잠에서 깨 보니 꿈이었다는 말이지요. 수백 번은 더 들었을 긴데요.”

요것아, 그 뒤에 새로 나온 책에는 야그가 다르데이. 들어봐라. 성진이가 이 이 세상에 양소유로 태어나서 팔선녀……

할매는 등굽은 허리가 낮아 머리가 방바닥에 닿을 만큼 지극 정성으로 치성을 드린다. 부모님보다 더 어른이시니 치성을 드릴 일이 더 많으신가보다.

지는 자부러서 잘랍니더.”

수리적꿈 하나 낼 테니 눕지 말고 앉아 봐라.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게 뭘꼬?”

글쎄요, 아이참, 예전에 할매가 말씀 하셨잖아요. 이 세상 누구도 못 이기는 것이 눈꺼풀이라고요.”

호호, 그러냐?”

기지개를 켜며 올려다본 하늘은 어질어질하고 샛별만이 초롱초롱하다. 은하수는 밤새워 허멀건 눈으로 꼬박꼬박 졸고 있다. 우리 가족은 모두 미래의 행복을 지극정성으로 기도를 드리는 치성가족이다. 불심이 넘치는 가족인 게야.

연수생들은 하나 둘 피아노 건반처럼 예서 까닥 제서 꿈틀좋은 성적을 위하여 기도를 하신다.

이 과목은 시험을 치지 않으니 편안한 마음을 들으십시오.”

평가가 없다는 강사님의 말씀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오매불망 좋은 성적을 위해서는 기도를 하는 것이 최선의 방도일 테지. 피교육자의 조바심 때문일까. 모두가 기도에 열중이다.

봄바람이 살짝 방 안 공기를 들여다본다. 중식이 맛깔스러워 한 술을 더 먹었다. 그것도 고마운 일이다. 오후 첫 시간은 삶에 고마움을 표하고 또 더 나은 내일을 위해 기도를 올린다. 강사님에게 들키지 않게. 남세스럽지 않게. 조용하게. 나비의 하얀 날갯짓이 꽃잎에 묻혀 버릴 때까지.

나른한 봄기운 속에 기도는 더 깊어진다. 교육을 바로 세울 지혜를 구하는 기도는 여전히 여기저기의 이어진다. 어머니의 모습을 얼핏 본 듯하다. ‘이런 !’. 정신이 들어 고개를 들다가 강사와 눈이 딱 마주친다. 열적은 웃음으로 기도를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