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란 무기 / 추선희
어느 초가을, 같이 사는 동지가 곧 생일인데 뭐 필요한 게 없냐고 물었다. 충동구매가 어렵기만 한 나는 계획한 대로 베이스가 필요한데, 라고 말했다. 진즉에 중고 베이스 가격까지 알아놓았다. 이십여 년을 한 방을 쓰고 살아도 그것을 알 리 없는 무던한 동지는 고민 하나를 떨쳐내는 웃음을 피워 올리며 당장 사라고 크게 말했다. 그는 악기 가격을 종잡지 못하므로 한 줄기 걱정이 얼굴에 남아있는 듯했는데 나는 선물을 받아야 마땅한 자의 호기로 친절하게 그것조차 날려버렸다.
“일단 중고로 살게.”
동지의 얼굴이 조금 펴졌다.
“한 삼십만 원이면 될 걸.”
잔주름, 큰 주름 다 펴졌다. 내가 알아본 베이스는 삼십오만 원짜리였다. 사십만 원 혹은 오십만 원이라도 그는 오랜 동지애로써 기꺼이 지불하겠지만 마찬가지의 동지애로써 나는 오만 원을 깎고 버렸다. 그가 완벽하게 편안한 얼굴로 말했다.
“지금 바로 돈 줄까?”
“그럴래? 고마워.”
그리하여 티 없이 파란 빛깔의 야마하 4현 베이스가 내 방에 들게 되었다. 동지의 생일 선물인 베이스를 사놓고는 몇 개월 쥐었다 놓았다 안았다 버렸다 하다 결국 놓아버린 상태가 몇 년간 지속되었다. 하지만 멀리 가지는 못했다.
일 년쯤 늘 두던 자리에 그대로 세워두고 오가며 바라보았다. 떠나보낸 애인리라도 몇 년은 가슴 이곳저곳에 숨겨놓고 음미한다. 품지도 않고 그렇게 오래 버려두다가 남긴 숙제 바라보듯 마음이 복잡해져 어느 날 케이스에 집어넣어버렸다. 집어넣을 이유는 많았다. 파란 몸에 먼지가 내려앉으므로, 찬 기운과 더운 기운에서 보호해야 하므로, 생일선물이므로, 베이스는 아무 저항도 못하고 검은 케이스에 갇힌 채로 곁에 계속 머물렀다. 옛 애인의 사진을 정리한다고 태우는 것은 아니다. 한동안 가까이 더 깊숙하게 둔다.
늦은 나이에 하고 싶던 공부 과정을 마친 후 그 뿌듯함에 스스로에게 선물을 주기로 마음먹었다. 쇼핑도 별로이고 사는 동네를 떠나 놀러 다니는 것에도 관심이 없는 나는 배움을 선물하기로 하였다. 자신에게 하는 선물은 배움이 최고라는 엄마에게서 물려받은 단단한 믿음이 있다. 나는 인생의 계획보다 조금 빨리 베이스를 정식으로 배워보기로 결심이라는 걸 하였다. 한가한 때를 기다리다 몸이 아프거나 새끼손가락 하나 탈이 나면 배울 수도 없을지 모른다.
급하고 중요한 것을 제일 먼저 해야 하고 그 다음으로는 급하지는 않지만 중요한 것을 해야 한다. 다행이 급하고 중요한 것이 그 때 내게 벌로 없었고 지금은 더 없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대체로 그러했다. 중요한 것은 급하게 할 수 있는 게 별반 없어서 그런지 모른다. 그러므로 하등 급하지는 않지만 매우 중요한 것, 베이스가 어떤 악기인지 제대로 체험해보기로 쉽게 마음먹었다. 수소문하여 전자공학을 전공했지만 한 번도 써먹지 않고 베이스만 붙잡고 있는 막내 동생뻘 선생님을 알게 되었다. 처음 만나던 날 말했다.
“십 년쯤 그러니까 환갑까지 배울 생각이니 많이 빨리 가르칠 필요 없습니다.”
“하하, 알겠습니다.”
“그리고 왜 그렇게 쳐야 하는지 알고 싶으니 이론 좀 가르쳐주시고요.”
“예, 잘 알겠습니다.”
이리하여 밥하고 강의하는 것 외는 그리 중요한 것이 없는 나는 지극히 낙천적이고 학생 요구대로 세월아 네월아 가르치는 선생님에게 레슨을 받기 시작했다. 첫 시간에는 배음에 관해서 배웠다. 한 음을 튕겼을 때 나는 파생음이 도 도 솔 도 미…의 순서이며 이것이 서양음악의 화음 형성 원리라는 것이다. 상대적으로 먼저 뒤따르는 소리와 합친 것이 협화음이며 늦게 나타나는 음과 합친 것이 불협화음이라고 했다. 또한 예전 종교음악에서는 불협화음을 함부로 사용하지 못했지만 지금은 불협으로 들리지 않을 만큼 청각도 시대와 함께 흘러간다는 것이다. 재미있고 신기했다. 나는 불협화음, 달리 말하면 어긋나고 애매하고 종지감이 없는 화음에 더 끌리는 인간임도 덤으로 알아차렸다. 이런 배움의 기쁨과는 달리 손가락은 참 말을 안 들었다. 특히 넷째와 새끼손가락은 힘도 없는 것이 고집은 세어 명령을 거부하고 애를 먹인다. 벌어지기도 거부하고 굽히기도 거부한다. 힘이 없으면 고집이라도 있어야 한다고 여기는 건지.
집에 아무도 없더라도 나는 선방 문 닫듯 조용히 방문을 닫고 어깨에 베이스를 멘다. 방 귀퉁이 나무의자에 앉아 둥 엇두 두두엇두, 두두엇두두 두둥… 기꺼이 시간을 축낸다. 마음의 결이 흔들리고 흔들리다가 종내 원래대로 돌아가기를 바란다.
본의가 아니게 분주해지려는 이즈음 이것은 아름다운 무기가 된다. 첨단 과학과 조형예술과 인간의 접점인 무기. 오차에 민감한 증폭되는 소리와 날렵하고 멋진 몸체에 내 마음이 가세해 이내 사라지는 소리가 울려나온다. 소리는 그 순간의 나를 드러내면서 마음의 찌꺼기를 허공으로 쏘아 올린다.
나는 무엇에 싸우고자 이 파란 무기를 다시 둘러멘 것인가. 뱃속이 시끄러운 나, 도망가려는 날, 이 모든 것에 자타에 무해한 무기가 필요해서인가. 이것은 바라보거나 사용하거나 간에 순간에 명멸하는 아름다움의 방식으로 그 순간을 보호한다. 이것은 전우가 지불한 삼십만 원의 가치를 예전에 넘었고 시간당 삼만 원인 레슨비의 가치도 무한정 넘어 세상에서 오직 중요한 두 가지, 나 자신과 내가 세상과 맺는 방식이라는 전장에서 고맙게도 나를 잘 지켜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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