긍정주의자 / 김영만
긍정의 힘, 나는 이 말을 믿는다. 믿을 뿐만 아니라 주변에 전하기까지 하는 완전 긍정주의자이다. 그러나 이런 내게 문제가 생겼다.
우리 아파트 앞에는 야트막한 동산이 하나 있다. 그 동산을 헐어 거기에 새 아파트를 짓는다고 건축 허가까지 받아 놓은 업체가 생겼다. 헐려고 하는 동산은 우리 아파트 값을 이만큼이라도 유지해 주는 언덕과 같은 존재다. 사철 꽃을 피워 지나는 사람들의 찬탄을 불러일으킨다든가, 시원한 숲이 앞뒤를 가로막아 한여름에도 더위를 느끼지 않게 해 준다든가 하는 것 따위는 다 위에 해당되는 말이다.
주민대책위원회가 만들어지고 회장과 임원들이 조직되고 벌써 몇 번째 주민회의까지 열렸다. 회의 때면 동네 가운데에 있는 중앙공원이 비좁을 만큼 주민들이 몰려나와 분통을 터뜨렸다.
두 번째의 모임에서인가. 내가 그 노인을 만난 건 그때가. 회장이 한참 열변을 토하고 있는 중인데 저만치 앞자리에 앉아 있던 머리 허연 노인 하나가 부스스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뒤로 돌아서서 회중을 한번 휘 둘러보는 것이다. 왜 저럴까. 만장의 시선을 잠시 한 몸에 받은 노인은 이상스럽게도 내가 있는 쪽으로 걸어와 옆으로 바짝 다가서더니, 참 걱정스럽네요, 하는 것이었다. 목소리가 작지 않아 옆 사람들도 들었을 터이지만 다시 앞을 주시하느라 말이 없었다.
가끔 아침 운동 삼아 오르는 뒷산에서 보았음직도 한 이 노인은 백발이지만 눈에 알 수 없는 총기가 박혀 있었다. 회장이 너무 오버를 해요, 좀 이상해요. 이상한 건 오히려 노인이 아닌가 싶었지만 그래도 그 말을 따라 단상의 회장을 다시 한 번 자세히 바라다봤다. 내가 보기엔 믿음직하고 훌륭하기만 한 회장이었다. 말도 힘차게 잘할 뿐 아니라 장대한 체구에 얼굴을 뒤덮은 수염이 무슨 일을 하거나 해내고 말 사람 같았고, 그가 뽑은 참모들도 또한 다 그럴 듯해 보였다.
우선 각 세대별로 10만원씩을 갹출하자, 몇 날이 되든지 건축 허가를 해준 시청 앞으로 가서 데모를 하자, 앞산에 들어가는 트럭을 막기 위해 주민 조를 짜 지키자는 등이 그날 회의 결정 사항이었다. 물론 나는 적극 찬동을 했고 옆의 노인은 반대했다. 목소리를 낮추어 타이르듯이 이렇게 한번 일러 주었다. 지금이 어느 때입니까. 잘못하면 앞산이 통째로 날아가게 되었어요. 회장에게 힘을 합해 주어야지요. 긍정적으로 생각합시다.
이내 일은 벌어졌다. 수십 대의 버스를 동원하여 시 청사까지 가 데모를 하기도 하고 주민 조를 짜 불침번을 서기도 하고 아파트 각동 건물에 울긋불긋 플래카드를 덮어씌우기도 했다. 들어오는 덤프트럭 앞에 드러누워 아예 죽기로 하고 싸우고 있다는 회장 얘기는 전의를 북돋았다.
그러나 노인은 내 곁에 서서 그 열기를 식히는 말만 계속했다. 이런 말도 했다. 세상이란 게 다 그렇고 그런 건데 저들이라고 다르겠어요. 대표라는 자들은 잘 살펴봐야 해요. 결사반대니 뭐니 하는 이 결사라는 말 많이 하는 회장 조심해야 해요. 하는 것 등이었다. 그나저나 이 노인은 왜 내 곁에만 붙어 이토록 떠나지를 않는 것일까. 자기 얘기를 들어줄 사람같이 보이는 건가. 아니면 나이가 지긋해 보여 친구라도 삼아 보려는 것인가. 어쨌든 이 긍정의 힘을 믿는 긍정주의자를 어떻게 보고 이러는가 싶었다.
할 수 없이 내 쪽에서 피하기 시작했다. 노인이 눈에 뛴다 싶으면 얼른 다른 쪽으로 가 숨었다. 그때마다 두리번거리며 찾고 있는 노인이 안돼 보이기도 했지만, 그러나 이런 부정적인 사람은 이 동네일 하나도 못 하게 만드는 병소나 다름없는 자다. 게임은 시작됐으니 두고 보자. 내가 이기나 노인이 이기나 하고 맘을 고쳐먹기로 했다. 이 싸움은 해를 넘기면서 장기전에 들어갔고 나는 무슨 일로 외국에 나가 있다 오게 되었다.
돌아와 본 동네 분위기는 영 달라져 있었다. 앞산에는 트럭 몇 대가 아예 흙을 파 실어 나르고 있는가 하면 아파트 입구를 지키는 대책위원회 사람들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다급히 관리인을 붙들고 물어본 나는 그 자리에서 그만 아연실색했다. 회장은 구속이 된 지 이미 오래고 대책위원회는 내분이 나 풍비박산이 났으며 앞산은 벌써 땅을 파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회장이 업자로부터 받은 뒷돈이 나타난 것만 5억이고 갹출금 등은 얼마인지 알 수도 없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여기저기 무엇 무엇을 공개하라는 시뻘건 현수막들이 나부꼈다.
참담한 심정이 되어 지내던 어느 날 아침이었다. 오랜만에 뒷산에 올라가 보니 늘 그랬던 대로 동로(洞老)들 몇이 둘러앉아 있는데 뜻밖에도 그 노인이 거기 끼어 있었다. 꾸벅하고 내가 먼저 인사를 했는데도 처음 보는 사람처럼 그저 멀찍이 바라다보고만 있던 노인이 갑자기, 지금 몇이슈? 하고 엉뚱하게 내 나이를 묻는 것이다. 그 묻는 것이 필경은 게임에 진 자에게 던지는 이긴 자의 말투였다. 아니 들어 보이는 나이답지 않게 세상눈이 어둔, 속이 차지 못한 사람에게 더는 말투이기도 했다. 어찌 됐건 난 진 자가. 패배한 긍정주의자였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을 해보니 그것도 아니었다. 그의 말대로, 다 그렇고 그런 세상사를 그는 그렇게 철저히 긍정하고 있었던 진짜 긍정주의자였고 난 그걸 부정하려 했던 어설픈 사람이었다. 긍정의 힘이란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나이를 물은 노인은 그냥 돌아서버리더니 저 아래로, 새벽부터 분주히 흙을 떠 나르고 있는 요란한 트럭들의 행렬에 시선을 던졌다. 그의 얼굴은 그러나 이긴 자의 그것과는 전연 다른 표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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