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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3

[좋은수필]춤을 춰요, 천천히 한 스텝씩 / 최성문

춤을 춰요, 천천히 한 스텝씩 / 최성문

 

 

 

창으로 비쳐드는 아침 햇살이 강렬했다. 초록 빛깔을 가진 생명이 자신의 젊음을 마음껏 뽐내는 계절, 여름이 오고 있었다. 여름의 싱싱함을 품고 활개 쳐야 할 나이지만 내 몸과 마음은 잔뜩 주름지고 오그라들어 있었다. 무거운 몸과 마음 탓인지 나는 자리에서 쉽게 일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가야 할 곳이 있었다. 겨우 몸을 일으켜 대학로로 향했다.

방송통신대학교 근처에 있는 허름한 건물 2층으로 올라가 현관문을 열었다. 쿵쾅거리는 커다란 음악 소리가 열린 문틈으로 밀려 나오며 내게로 쏟아졌다. 흥겨운 음악이 무거운 내 몸을 가볍게 감싸 안았다. 한쪽 벽면 전체가 거울로 덮혀 있는 이곳에 먼저 온 네 명의 사람이 몸을 풀고 있었다. 나는 춤을 추러 온 것이다. 능력 있는 작가가 되고 싶은 열망은 몸을 상하게 했고, 일 년째 생리주기가 맞지 않아 호르몬제를 복용했다. 몸을 추스르고 글을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뻣뻣한 몸과 고르지 못한 살, 몸의 균형과 맞지 않는 넓은 어깨 무용하기에 좋은 몸매가 아닌 내 모습이 거울에 비쳤다. 못나 보였다. 우아한 곡선을 그리며 춤추는 선생님을 따라해 보았지만 굳어져 있는 내 몸은 쉽게 아름다운 선을 그릴 수 없었다. 힘들다는 말을 습관적으로 뱉어내며 한참을 따라 하는데 갑자기 눈에 물기가 고여 왔다.

함께 춤을 추는 사람들은 대부분 내가 아는 이들이다. 어린 시절부터 무용수를 꿈꿨지만 꿈을 이루지 못한 이, 배우가 되고 싶어 하지만 여전히 무대 뒤에 서 있는 이, 춤을 열망하다 서른이 넘어 무용을 전공했으나 생각한 것만큼 성공하지 못한 이, 그리고 멀게만 느껴지는 꿈을 향해 힘겹게 걸어가는 나. 꿈을 꾸고 노력한다면 이룰 수 있다고 쉽게 할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꿈을 포기하거나 아예 꿈조차 꿀 수 없는 환경에 처한 사람들을 나는 많이 보아왔다. 춤을 배우러 간 첫날, 뻣뻣한 몸을 억지로 펴야 하는 아픔과 더불어 나는 괜스레 슬퍼졌다.

춤을 추러 간 두 번째 날, 나는 조급하지 않게 천천히 움직였다. 완벽한 무용수의 몸짓을 원하는 초짜의 성급한 마음을 내려놓았다. 동작으로 표현되는 몸의 느낌을 하나씩 곱씹었다. 고통으로 떨리는 몸의 작은 흔들림까지도 놓치지 않으려고 애썼다. 점차 음악이 몸을 타고 흘러내렸다. 음악이 피부의 표피를 뚫고 깊게 스며들었다. 몸으로 흡수된 음악이 나와 하나가 되었다. 두 팔로 몸을 둥글게 감싸 안았다. 한참을 그대로 있었다.

내 몸이 참 좋구나.’

이런 감정을 느껴본 적이 있었을까. 문득 남들과 비교하여 못나 보였던 나 자신에게 괜찮아, 라고 위로하는 말이 떠올랐다. 두 팔과 두 다리를 최대한 넓게 벌렸다. 몸이 활짝 열리며 마음도 커다랗게 열리는 것 같았다.

다섯 번째 레슨이 있는 전날 밤, 나는 친구들과 늦게까지 만났다. 대학을 졸업할 때는 10년 뒤엔 무언가 이루어 폼 나게 살고 있을 것으로 생각했으리라. 하지만 다들 평범하게 살아가고 있었고 여전히 길을 찾지 못했다. 불투명한 미래에 대한 조바심으로 가득한 대화는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하고 어둠 속을 방황했다.

막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온 나는 쉽게 잠들지 못했다. 겨우 잠든 나를 깨운 것은 빗소리였다. 비가 내린다고 생각하니 아침에 있는 무용 레슨을 받으러 가기가 귀찮아졌다. 춤을 전공할 것도 아닌데 애써가며 배울 필요가 없다고 여겨졌다. 또다시 부정적인 생각이 꼬리를 물고 늘어졌다. 어쩌면 묵묵히 내 길을 걸어가지 못하게 하는 건 바로 나 자신일지도 모른다. 부정의 언어와 절망의 이미지를 만드는 내가 범인일지고.

아침에 일어나 레슨을 받으러 갈까 말까, 하고 몇 번을 고민하다 몸을 일으켰다. 찌뿌듯한 몸을 풀면 우울함도 사라지겠지 하는 바람이었다. 밖으로 나오니 하늘은 곧 비가 쏟아질 듯 꾸물거렸다.

나는 두 번째 날의 느낌을 잊지 않으려 애쓰며 춤을 췄다. 흐린 날씨 탓인지 연습실의 공기는 들뜨지, 않고 차분히 가라앉았다. 이상하게도 동작이 몸에 잘 맞는 옷처럼 달라붙었다. 매번 반복하는 동작이지만 그동안은 잘 소화해내지 못했다. 음악에 맞춰 몸을 움직인 지 한 시간이 지나고 내가 가장 어려워하는 다리 찢기 순서가 되었다. 여전히 바닥에서 붕 뜬 상태로 있을 거로 예상했는데 몸이 바닥에 가까이 닿았다. 누군가 내 발목에 끈을 묶어 양쪽에서 잡아당기는 것 같았다. 몸이 한없이 길어지는 느낌이었다. 고통과 함께 기쁨이 차올랐다. 분명히 지난번까진 되지 않았던 동작이었다.

똑같은 동작을 지겹도록 반복하면 몸은 기억하고 어느 순간 그것을 소화해 낸다. 내가 멋지게 춤을 출 수 있는 날은 언제쯤일까. 1년 아니면 2, 3년 뒤에? 아마도 춤에 소질이 없는 나는 더 오래 걸릴지도 모른다. 비록 춤을 잘 못 추더라도 상관없지 않을까. 조금씩 춤의 감각을 터득해가는 내 모습이 이렇게 기쁜데 말이다. 소질이 없지만 춤을 잘 추고 싶은 바람처럼 될 수 없는 나와, 되고 싶은 나 사이에서 나는 늘 우울하다. 그러나 꿈을 향해 한 스텝씩 연습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감사한 게 아닐까. 세상엔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한 연습 시간을 갖지 못하는 이들이 오히려 더 많지 않은가.

욕심 내지 말고 천천히 한 스텝씩만 밟으라고 춤이 나에게 말을 건넨다. 꿈꾸는 과정이 오히려 더 빛나는 순간임을 잊지 말라고 온몸으로 느끼게 해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