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사랑 / 최태준
사람을 잘못 보았나. 눈을 비비고 다시 봐도 분명 그녀였다. 가슴에 꽃을 달고 손님들을 맞는 품새에서 옛 모습이 고스란히 묻어났다. 옆엔 머리가 훌렁 벗어진 남편인 듯 풍채 좋은 남자가 서있었다.
봉투에 축의금을 넣고 ‘축 결혼’ 이라 쓰고는 뒤에 이름을 적었다. 그녀가 나를 알아보기나 할까. 알아보고도 짐짓 모른 척한다면…… 하지만 그럴 이유가 없지 않은가. 하객들에게 떠밀리다시피 하여 그녀 쪽으로 다가갔다. 얼추 나의 순서가 다가왔을 때 그녀와 딱 눈이 마주쳤다.
“축하드립니다.”
당황스런 마음을 진정시키려고 일부러 목소리를 깔아 던진 한 마디가 내 귀에도 괜찮게 들렸다. 나를 본 순간 멈칫하던 그녀는 이내 얼굴이 상기되었다.
“어머나, 어떻게 아시고…….”
우려와는 달리 그녀가 나를 금방 알아보았다. 어디 살며 은퇴는 했는지,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사는지, 잠시 서로 근황을 물었다. 결혼하는 아이는 막내딸이라 했다. 하객들이 뒤에 긴 줄을 이어 더 이상 얘기를 나누기 어려웠다. 나중 보자는 말과 함께 물러났다. 옆 홀의 다른 결혼식 하객으로 왔었다가 먼발치에서 우연히 그녀를 알아보았던 것이다.
사회자의 목소리가 식장 밖으로 우기의 두꺼비 울음처럼 왕왕 거리며 들려왔다. 이윽고 복도가 한산해져 자판기에서 커피를 뽑아 의자에 앉았다. 종이컵에서 피어오르는 하얀 김이 호들갑스럽게 곡선을 그리며 흩어졌다. 초로의 그녀와 추억 속의 그녀, 그 낯선 시간의 괴리를 어떻게 메워야 할지 아득했다.
초등학교 6학년 여름 방학 때였다. 형수의 방 문 앞을 지나는데 소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열린 방문 사이로 하얀 칼라의 중학생 교복에 단발머리를 한 뽀얀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나의 기척에 소녀가 흘금 돌아봤다. 나는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첫눈에 그녀와 사랑에 빠지고 말았다.
소녀는 나보다 두 살 연상으로, 여름 방학을 맞아 이모인 나의 형수에게 인사차 온 것이었다. 그때 생전 처음 가슴이 콩닥거리는 야릇한 경험을 했다. 그녀를 보면 무슨 죄라도 지은 양 가슴이 먹먹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날 이후로 주위의 하찮은 사물들, 이를테면 나무, 꽃, 구름, 조약돌 같은 것들이 정겹게 다가왔다. 갑자기 훌쩍 커 버린 느낌이었다.
그녀는 매년 여름이나 겨울, 우리 집에 왔다. 그녀는 대개 며칠 간 머물렀으므로 내가 말을 붙이려고 뜸을 들이다 겨우 마음을 열면 벌써 떠날 채비를 했다. 그녀가 가고 나면 마음이 몹시 허전했다. 방학을 마치고 친구들과 어울릴 때까지 그녀의 빈자리에서 묻어나는 아련한 슬픔을 만지작거렸다. 그녀가 곁에 잠시 머물다 가는 일은 마치 손꼽아 기다리던 첫눈이 하늘에서 내려와 땅에 닿자마자 녹아 버리는 것처럼 안타깝고 감질나는 것이었다.
그녀에 대한 감정은 점점 깊어만 갔다. 그녀가 그리울 때면 언제나 대학 노트에다 편지를 썼다. 스산한 겨울이면 그리움이 더욱 심했다. 까치가 우는 날은 동구 밖에 나가 혹시 그녀가 오려나 싶어 멀리 내다보기도 했고, 속절없이 발길을 돌릴 때면 휑하니 뚫린 가슴에 찬바람이 스쳐 지났다. 그럴 때 그녀의 이름을 나직이 부르면 위로가 되고 다시 힘이 솟았다.
대학 입시를 앞둔 여름, 직장에 다니던 그녀가 휴가를 얻어 왔다. 그녀가 가까이 있다는 사실이 꿈만 같았다. 그녀에게 써 온 편지가 대학 노트 한 권을 채울 무렵이었다. 그녀에게 편지를 쓰는 일은 혼자 벽에다 말하는 것처럼 답답하기 짝이 없는 노릇이어서 갈수록 글은 한탄조로 변했다. 편지를 다시 읽을 때마다 감정이 복받쳐 올라 애물단지가 따로 없었다. 그녀가 떠나는 날 노트를 손에 쥐어 주었다. 그렇게 마음을 정리하고 싶었다.
내게 소중한 일들이 남들에게는 얼마나 시시콜콜한 얘기일까. 그러므로 여분의 이야기는 이즘에서 줄이는 게 무던할 것이다. 그녀는 결혼을 하였고, 나도 가장을 이루었다. 어쩌다 꿈속에서 그 첫사랑을 만나면 애틋하고 허전한 나머지 이튿날은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사랑’ 이라는 어휘와 마주치면 그녀가 먼저 머릿속에 들어와 앉았다. 그러나 첫사랑의 애틋함은 세월이 갈수록 차츰 사위어 갔다.
내가 상념의 끝자락을 헤맬 즈음 하객들이 식장에서 쏟아져 나왔다. 남은 커피는 식어 있었다. 식장에서 쟁반 가득 음식을 담아 구석자리에 앉았다. 갑자기 식욕이 당겼다. 그녀에 대한 그리움의 허기가 도진 걸까. 그리움의 더께를 떼어낸 자리에 생긴 공허감 때문일까. 그녀만을 생각하며 보낸 남루한 내 청춘을 위무할 요량으로 그녀가 차린 음식으로 포식을 했다.
그녀가 테이블을 돌면서 하객들에게 인사를 하는 동안 자리에서 일어섰다. 남들처럼 형식적인 인사를 나누기는 싫었다. 30년 만에 그녀를 만났는데 이처럼 우연히 마주치려면 또 얼마나 많은 세월이 흘러야 할까. 엉거주춤 식당을 나서는데 뒤에서 누군가 옷깃을 당기는 느낌이 들었다. 뒤돌아보니 멀리서 그녀가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게 아닌가. 머뭇거리다가 짐짓 모른 척 하며 주차장을 향해 곧장 걸었다.
순환 도로를 달리는데 신천의 분수가 하공을 쏘며 시원하게 물보라를 일으켰다. 옛날 그녀를 처음 보던 바로 그날 내 마음속에서 터지던 그 폭죽 같았다. 지난 일들이 빠르게 눈앞을 스쳐 지났다. 가슴이 싸하게 저려 왔다. 급히 식당 나온 것을 후회하려는 찰나, 띵똥, 문자가 들어왔다. 아내였다.
“여보 어디?”
아내는 말도 되지 않게 내가 자신의 첫사랑이라고 우기는 사람이다 답을 타전했다.
“서둘러 귀가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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