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수필세상/좋은수필 3

[좋은수필]대놓고 자랑하기 / 이상렬

대놓고 자랑하기 / 이상렬

 

 

저뭇한 귀갓길, 세상이 온통 스산하게 보입니다. 그깟 일에 평정심이 깨어진 걸 보니 나는 아직 한 참 멀었나 봅니다. ‘하늘을 향해 시선을 두기’ ‘요란한 세상 고적하게 살기위해 온갖 주춤새를 다 떨어 보지만 자식 문제 앞에서는 그 어설픈 모양새까지도 망가지고 맙니다. 어디서일까 추적해 봅니다.

 

소위, 상류사회랄까요. 나와는 어울리지 않는 자리에 초대를 받았습니다. 높으신 분의 출판기념회입니다. 실내에 음악이 흐릅니다. 조금이라도 나은 첫 인상을 구현하기 위함일까요. 교과서에 나오는 인사말들이 오고갑니다. 곧이어 가족소개가 시작되었습니다. 어디선가 꼬르륵소리가 났습니다. 내 배는 아닙니다. 옆에는 요크셔 카운티 대저택 귀족 마님처럼 생긴 분이 앉았습니다. 나를 위아래로 훑어봅니다. 내가 배고프게 생겼나 봅니다. 네 명의 자녀가 무대에 섰습니다. 의사 둘, 검사 두 명이었습니다. 어찌 하나같이 잘생겼는지요. 분명 다른 별에서 온 사람들이 틀림이 없습니다.

 

근데, 스멀스멀 이상한 기분이 올라옵니다. 집으로 오는 내내 마음에 돌덩이 하나를 얹은 기분입니다. 분명 아름다운 장면인데 그것 때문에 나의 속물적 비위가 거슬린 걸 보니, 나야말로 고약한 심보를 지닌 진짜 속물입니다.

 

현관에 들어서는 순간, 인사를 하고 휙 돌아앉는 고교생 딸아이가 괜히 밉습니다. 짧은 교복 치마에, 터질 듯 꽉 쪼이는 윗도리를 입고 컴퓨터 앞에 다리를 꼬고 앉아 있습니다. 볼에는 허연 분까지 발랐습니다. 내일이 중간고산데 저러고 있습니다. “저저저~” 나도 모르게 무구한 원색어가 목까지 차오릅니다. 그저께는 군대 간 아들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제대 후, 공부에 취미가 없으니 복학보다 돈 벌겠다는 말이었습니다. 뒷목이 뻐근합니다.

 

늦은 시간, 딸아이 방에 들어가 보았습니다. 잠옷 한쪽 다리 둥둥 걷고 자고 있는 딸아이 머리맡에 쪽지 한 장 펼쳐져 있었습니다. 친구의 편지였습니다. ‘지혜야, 너 우리 학교에서 다리가 제일 예쁜 거 알아?’ , 난 이제껏 몰랐습니다.

 

오직 부모가 되었을 때만 느낄 수 있는 아름다운 착각, 이게 팔불출 정신입니다. 나도 무대 위에 올려놓고, 대놓고 자랑 한번 할 랍니다. ‘딸은 밥을 맛있게 먹습니다. 된장찌개 하나만 있어도 밥 한 그릇 뚝딱입니다. 다 먹고 난 뒤 꼭 맛있게 먹었다고 말합니다. 딸은 사랑한다는 말을 곧잘 합니다. 쌍꺼풀이 없어도 눈이 예쁩니다. 딸은 침대 난간에 붙어 자면서도 한 번도 떨어진 적이 없습니다. 아빠가 집에 들어오면 항상 먼저 달려와 꼬옥 안깁니다.’

 

군대 간 아들 고교 때, 학교로부터 온 자녀 장점 100가지 쓰기라는 숙제가 있었습니다. 부모에게 주어진 과제였습니다. 아내는 10개도 못썼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숙제라고 했습니다. 그날 밤, 나는 아들의 장점 100개를 다 썼습니다. 혼났습니다. 쓰기 어려워서가 아니라 울컥해서 말입니다. 컴퓨터에 저장된 그때 자료의 일부를 소개합니다.

 

96. 아들은 그림을 잘 그립니다.

97. 아들은 큰 소리로 인사를 잘합니다.

98. 아들은 일주일의 이틀을 아르바이트를 해 제 용돈을 법니다.

99. 아들은 응가를 통쾌하게 합니다. 들어가면 10초 만에 해결하고 나옵니다.

100. 아들은 무명작가, 가난한 아빠를 세상에서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밤이 깊었지만 잠을 놓쳐버렸습니다. 논두렁을 발밤발밤 걸었습니다. 별이 무수합니다. 내 아이들, 다른 별에서 오지 않아서 참 다행입니다.